하재근 문화평론가
한류 히트 드라마의 작가, 연출자, 주연배우들이 모두 사과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바로 ‘21세기 대군부인’ 논란이다. 많은 매체들이 이 드라마의 고증 문제를 지적했다. 고증 관련 시스템을 만들자는 전문가의 대안도 제시됐다. 하지만 고증은 문제의 핵심이 아니었다. 고증을 잘 하면 오히려 문제가 더 악화될 수도 있다. 이 작품은 조선 왕실이 그대로 이어져 현대 한국이 입헌군주국이라는 상상을 담았다. 그래서 조선 왕실의 문화가 현대에 그대로 재현됐다.
바로 이 점이 문제였다. 조선이 그대로 이어졌다는 상상 그 자체 말이다. 이런 상상을 하면서 엄밀한 고증으로 조선 왕실 문화를 그대로 재현하면 할수록 문제가 더 심각해질 것이다. 지금 논란이 된 ‘천세’나 ‘구류면류관’ 등은 모두 전문가 자문을 받은 설정이라고 한다. 이미 고증이 됐다는 얘기다. 그럼에도 논란이 터진 건 결국 고증 이전에 상상 그 자체가 문제였다는 뜻이다. 그저 고증을 잘 하라고만 하면, 앞으로 조선을 엄밀하게 잘 재현하기만 하면 이런 상상을 또 드라마화해도 된다는 이야기다. 그러면 논란이 끊이지 않을 것이다.
문제의 핵심은 고증 미비가 아닌 한국 격하였다. 조선이 그대로 이어졌다는 상상이 한국 격하가 되는 것은 과거 동아시아의 국제 관계가 특수했기 때문이다. 조선은 중국의 식민지가 아닌 자주국이었지만, 외교적으로는 중국에 사대하는 위치였다. 중국은 황제국으로서 각 나라들의 위에 서고 조선은 왕국으로서 모든 왕실 문화가 중국 황실에 비해 낮은 위계에 있었다. 그래서 통치자가 황제가 아닌 왕이었고, 그의 아들들은 황태자와 친왕이 아닌 세자와 대군으로 불렸다. 그러니까, 이 드라마 제목에도 나오는 ‘대군’이란 표현은 고증이 잘 된 것이지만 그게 중국에 비해 격이 낮은 표현이라서 문제가 될 수밖에 없다.
조선 시대를 배경으로 한 사극이야 과거의 역사를 표현한 것이니까 고증을 통해서 사실대로 표현하면 된다. 하지만 현대엔 국제질서의 틀이 완전히 바뀌었기 때문에 현대에도 조선 왕조의 문화가 그대로 이어졌다는 상상을 표현하면 그게 현대 한국의 국격을 중국에 비해서 한 단계 낮추는 결과가 빚어진다.
요즘 한국 드라마는 우리끼리만 보는 것이 아니다. 외국인들이 더 열광하는 경우도 많은데, 많은 외국인들은 케이 드라마를 통해 한국을 파악한다. 그래서 웬만한 전문서적보다도 드라마가 우리나라를 알리는 데 있어서 더 중요한 역할을 할 때가 많다. ‘21세기 대군부인’ 같은 드라마를 통해 한국이 중국의 제후국 반열이라는 오해가 만들어질 수 있는 것이다.
중국은 최근 경제성장을 통해 국력이 강성해지고 있다. 역사적으로 중국이 강성해지면 대체로 팽창하는 경향이 있어왔다. 그래서 우리나라 입장에선 경계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데, 중국 측에서 동북공정 등으로 한국 문화를 흡수하려는 움직임까지 보이니 더욱 우려가 커진다. 게다가 중국의 일부 애국주의 누리꾼들은 한국을 중국 아래의 제후국 정도로 인지하면서 은근히 내려다보는 경향이 있다.
이럴 때 ‘21세기 대군부인’ 같은 드라마가 국제적으로 널리 알려지면 중국 애국주의 누리꾼들에게 이용될 가능성이 있다. 자기들은 12류 면류관을 쓴 황제에게 ‘만세’라고 하는 나라인데 한국은 9류 면류관을 쓴 왕에게 ‘천세’라고 하는 나라라고 말이다.
이런 맥락이 있기 때문에 조선을 현대에 재현하는 상상은 우리 국격을 떨어뜨릴 위험이 있는 것이다. 조선을 얼마나 잘 재현하는가의 고증 이전에 이런 국제관계의 흐름을 파악해야 한다. 굳이 현대 한국을 입헌군주국으로 상상하려면 황제국으로 설정했어야 했다. 대한제국의 맥이 이어졌다고 해도 되고, 아니면 상상의 제국을 만들어도 된다. 이건 역사적 사실이 아니기 때문에 고증과는 별개의 문제다.
중요한 건 한국이 자주국으로서 중국과 대등한 국격으로 표현돼야 한다는 점이다. 이런 문제를 작가부터 연출자, 제작 관계자들이 모두 몰랐다는 점이 너무나 놀랍다. 그저 조선을 현대에 재현하면서 전통적인 궁중암투 설정과 현대 로맨스 장르를 섞는 데에만 함몰됐던 것 같다. 조선을 잘 재현할수록 문제인데 말이다. 제작, 방송 관계자들이 현대 국제관계 관련 소양을 잘 갖춰야 이런 일이 재발하지 않을 것이다. 수준 높은 고증 문제까지 가기 이전에 기본적인 인문교양부터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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