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엽 법무법인 오킴스 파트너 변호사
5개월의 교섭, 결렬과 중재, 그리고 총파업 한 시간 반 전의 극적 잠정타결. 삼성전자 성과급 분쟁이 한 고비를 넘긴 순간, 세간의 이목을 사로잡은 것은 협상 과정의 드라마가 아니었다. 메모리사업부 직원 1인당 성과급이 최대 6억원에 달할 수 있다는 숫자였다. ‘6억’이라는 세 글자가 소셜미디어를 가득 채웠다. 그 반응은 단순한 분노만이 아니었다. 경이로움, 허탈함, 그리고 ‘도대체 이게 무슨 영문인가’라는 낯선 감각이 뒤섞인 것이었다.
흥미로운 것은 그 반응이 삼성 안에서도 다르지 않았다는 점이다. 잠정합의안이 발표되자 마자 스마트폰·가전을 담당하는 DX 부문 직원들이 들고 일어났다. 실적 부진에 신음하는 자신들은 이번에도 소외됐다는 것이다. 노조가 다른 노조를 향해 부결 운동을 펼치는 이례적 장면이 연출됐다. 외부에서 보기에 ‘삼성 직원’은 하나였지만, 그 안은 이미 깊이 갈라져 있었다.
여기서 우리는 현상의 표면이 아니라 그 아래를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성과급을 둘러싼 소란은 단순한 임금 분쟁이 아니다. 이것은 바로 인공지능(AI) 시대라는 거대한 지각변동 앞에 선 사람들의 실존적 공포가 응축된 사건이다. 사람들이 반응하는 것은 삼성 직원의 통장 잔고가 아니라, 자신의 미래가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 하는 불안이다.
인류학자 데이비드 그레이버는 현대 노동의 많은 부분이 스스로도 의미를 느끼지 못하는 일들로 채워져 있다고 했다. 역설적이게도 지금 사람들을 가장 불안하게 만드는 것은 그 일마저 빼앗길지 모른다는 두려움이다. AI가 반도체 설계를 보조하고 코드를 짜고 법률 문서를 검토하는 시대에, 나는 과연 노동자로 살아남을 수 있는가. 이 공포는 직업을 가리지 않는다.
특히 디지털 경제의 언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이들과 그렇지 못한 이들 사이의 경계에서, 아날로그 숙련이 디지털 전환 앞에서 하루아침에 무력해질 수 있다는 공포는 단순한 임금 격차가 아닌 이 시대 불안의 또 다른 단층선이다.
삼성전자 DS 직원들은 한국에서 가장 각광받는 직군에 속한다. 그러나 그들이 성과급 상한 폐지를 그토록 강하게 요구한 배경에는 욕심만이 아닌 불안이 깔려 있다. 반도체 공정 자동화가 가속되고, 글로벌 경쟁에서 뒤처지면 회사 자체가 흔들린다는 것을 그들 스스로 누구보다 잘 안다. 지금의 호황이 영원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도. ‘삼성에 다닌다’는 것이 평생의 안전판이 되던 시대는 이미 끝났다. 그들도 ‘마지막 노동자’라는 자의식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6억’을 향해 쏟아진 외부의 감정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읽힌다. 자신이 몸담은 일이 조만간 자동화될지 모른다는 불안,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좁혀지지 않는 격차에 대한 체념, 그리고 그 체념이 터져 나오는 순간. 이것은 질투가 아니라 공포다. 모두가, 서로 다른 위치에서, 같은 두려움을 짊어지고 있다.
분쟁 실무를 오래 다루다 보면 한 가지를 실감하게 된다. 갈등이 가장 위험해지는 순간은 그것이 표출될 통로를 잃었을 때다. 이번 사태에서 노사가 끝내 교섭 테이블로 돌아왔다는 것, 정부가 중재자로서의 역할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은 과정의 고통에도 불구하고 의미 있는 일이다.
그러나 AI 전환의 과실을 어떻게 나눌 것인지, 기술 혁신이 만들어내는 새로운 불평등에 사회는 어떤 안전망을 마련할 것인지 등 성과급 논란이 드러낸 더 근본적인 물음은 한 기업의 협상 테이블 위에서 전부 해소될 수 없다.
찬반투표가 어떻게 끝나든, 이번 사태는 하나의 균열을 선명하게 드러냈다. ‘마지막 노동자’가 되지 않으려는 공포가 이미 사회 전체를 관통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 공포를 담아낼 더 크고 구조화된 사회적 조정의 테이블이 우리에게 아직 없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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