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마놀로 블라닉
프라다를 입는 악마는 늘 마놀로를 신었다.
지난해 미국 패션지 보그 편집장에서 사임한 패션계 거물 안나 윈투어가 그랬다.
20년 만에 속편이 나온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의 주인공 미란다(메릴 스트립)의 실제 모델로 알려진 안나는 마놀로 블라닉의 투 스트랩 누드 구두를 즐겨 신은 대표 인물이다. 스페인 출신 디자이너 마놀로 블라닉이 1994년 안나의 발에 맞춰 제작한 구두인데, 그는 디자인을 조금씩 달리해 매년 몇 켤레씩 주문해 신은 것으로 알려졌다. 샌들엔 자신의 이름을 따 ‘AW’(Anna Wintour)라는 모델명까지 붙었다.
마놀로는 ‘악마’ 안나가 애착한 구두일뿐 아니라, 유명인들이 패션 센스를 뽐낼 때마다 꺼내드는 단골 아이템이기도 하다. 지난 2023년 12월 정용진 신세계그룹 회장이 소셜미디어에 공개한 부부 사진에서 부인 한지희 씨가 빨간 마놀로 블라닉 한기시 펌프스를 신은 모습이 전해지기도 했다.
가늘고 긴 9cm 스틸레토 힐과 발등에 내려앉은 화려한 큐빅이 특징인 한기시 펌프스는 마놀로 블라닉의 대표 제품 가운데 하나다. 2000년대 미국 드라마 ‘섹스 앤 더 시티’의 주인공 캐리 브래드쇼가 열광한 구두로 등장해 세계적인 인기를 끌었다. 특히 캐리가 신은 200만원대 안팎의 파란색 한기시 펌프스는 여러 영화와 드라마에 ‘웨딩 슈즈’로 등장하면서 ‘청혼 구두’라는 별칭이 붙기도 했다.
패션업계 트렌드 세터부터 셀럽, 인기 배우들의 발을 점령한 이 브랜드는 마놀로 블라닉이 1970년 창업한 구두 브랜드다.
마놀로는 부모님의 바람에 밀려 스위스 제네바 대학에서 법·정치학을 공부했지만 결국 디자이너가 되겠다는 꿈을 접지 못해 대학 졸업 후 루브르 아트 스쿨에서 다시 공부를 시작했고, 1970년 자신이 일하던 런던의 구두점을 2000파운드(약 285만원)에 인수해 자신의 브랜드숍을 차렸다.
그는 이듬해 뉴욕 여행길에서 당시 보그 편집장이던 다이애나 브릴랜드와 운명적으로 만난다. 마놀로의 포트폴리오 중 체리와 넝쿨로 발목을 감싼 형태의 디자인에 깊은 인상을 받는 다이애나는 “이 구두를 직접 만들어보라”며 구두 디자인에 집중할 것을 제안한다. 그는 유명 구두 디자이너들의 컬렉션을 제작하는 것부터 시작해 다이애나의 제안을 실천, 통굽이 유행하던 시대에 킬힐 돌풍을 일으키며 1974년 영국 보그 잡지 커버를 장식하게 됐다. 구두 디자이너의 살아있는 전설로 등극한 순간이다.
마놀로는 1990년대에 영국으로 진출해 구두를 단순한 잡화가 아닌, 예술품의 반열에 올린 디자이너로 서 인정을 받는다. 런던 디자인 박물관에서는 마놀로 블라닉의 컬렉션과 스케치의 가치를 인정해 영구 보존하고 있다.
김수연 기자 newsnews@dt.co.kr
실시간 주요뉴스
기사 추천
- 추천해요 1
- 좋아요 0
- 감동이에요 0
- 화나요 0
- 슬퍼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