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성제 청주대 무역학과 교수(경영학 박사)
세계 무역의 패러다임이 물건에서 데이터로 빠르게 옮겨가고 있다. 이제는 데이터를 얼마나 잘 다루느냐가 실력으로 통하는 ‘디지털 무역’ 시대다.
과거에는 단순히 종이 서류를 전자문서로 바꿔서 주고받는 무역자동화가 대세였지만, 이제는 전 세계 기업들이 디지털 플랫폼을 통해 실시간으로 데이터를 주고받고 업무에 바로 활용하는 시스템 중심의 시대가 됐다. 하지만 이러한 디지털 시대로의 전환 뒤에는 우리 수출 기업들의 발목을 잡는 커다란 장애물이 숨어 있다. 바로 무역 서류의 규격과 양식이 나라마다 다르고, 서로 데이터를 주고받는 방식도 호환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특히 돈을 청구하는 서류인 송장(Invoice)의 경우, 나라나 기업마다 양식이 제각각이라 우리 기업들에게는 큰 비용 부담과 거래 위험으로 돌아오고 있다.
해외 바이어가 요구하는 특정 양식에 맞추기 위해 그때마다 새로운 시스템을 따로 만들거나, 서류가 맞지 않아 물건 값을 늦게 받는 상황은 중소·중견 기업들에게 큰 고통을 준다. ‘표준’이 없다는 것은 단순히 불편한 일을 넘어, 우리 기업들이 글로벌 공급망에서 배제되거나 막대한 추가 비용을 지불해야 하는 새로운 형태의 ‘디지털 장벽’이 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현재 유럽을 포함해 세계 40여개국이 사용 중인 ‘페폴’(Peppol, Pan-European Public Procurement On-Line)은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실질적인 방법이다. 페폴은 특정 플랫폼만 쓰라고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시스템을 쓰더라도 데이터를 자유롭게 주고받을 수 있게 도와주는 ‘국제 디지털 무역 네트워크 표준’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가 페폴을 도입하면 국내에서 사용 중인 전자무역 인프라를 그대로 유지하면서도 글로벌 표준과 연결되는 ‘게이트웨이’를 갖게 되는 것과 같다. 우리 기업들이 이 공용 표준망에 참여하면, 거래 상대방마다 일일이 시스템을 새로 만들 필요 없이 전 세계 누구와도 즉시 문서를 교환할 수 있는 강력한 경쟁력을 갖게 되는 것이다.
페폴은 지난 2008년 유럽연합(EU)의 11개 회원국들이 공공부문의 조달 업무를 디지털화하고 부가가치세 누수 방지와 행정 효율화를 위한 사업으로 시작됐다. 최근에는 기업간 거래(B2B)에도 확대되고 있으며 일본, 싱가폴, 호주 등 비유럽권 국가에서도 도입하는 등 확산 추세다.
우리나라는 국내거래에서 송장의 용도로 전자세금계산서를 널리 사용하고 있으며, 국제무역에 페폴을 도입하기 위해 한국무역협회와 전자무역기반사업자가 연구용역을 실시하는 등 민·관 합동으로 페폴 서비스 제공을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하고 있다.
페폴 사용의 장점을 우리나라의 국가 경쟁력 상승으로 이어지게 하기 위해서는 전략적으로 실행 과제들을 수립하고 이를 체계적으로 준비해 나갈 필요가 있다. 먼저 정부가 주도해 정책 지원을 펼칠 필요가 있다. 과거 정부가 국가 전자무역시스템(uTrade Hub)을 구축해 무역계약, 통관, 물류 등 수출입 전과정에 대한 문서를 전자화해 처리할 수 있도록 한 것처럼 페폴 서비스를 공공 플랫폼으로 구축하고 법과 제도도 미비한 점이 없는지 파악해 개선해 나가야 한다.
이와 동시에 우리나라의 전자무역 전문 기관인 ‘국가전자무역기반사업자’를 한국의 ‘페폴 서비스 운영기관’으로 지정하는 것이 필요하다. 국가전자무역기반사업자는 지난 30여년 동안 쌓아온 전문성을 바탕으로 페폴 표준과 국내 전자무역 시스템을 유기적으로 잘 결합하고, 보안과 인증에 대한 기준을 잡아주는 구심점 역할을 하기에 가장 적합하다.
유럽 수출이 많은 자동차, 조선, 바이오헬스, 반도체 분야부터 ‘주문-송장-정산’의 전 과정을 ‘페폴’ 표준으로 연결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를 통해 물건 값을 더 빨리 받고 비용을 아끼는 효과를 직접 수치로 증명하면, 이를 모든 산업으로 확대시켜 나갈 수 있을 것이다.
페폴은 지난해 수출 7000억달러를 달성한 우리 기업들이 수출 1조달러 시대를 향한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반드시 손에 넣어야 할 글로벌 표준과 관련된 ‘지렛대’다. 글로벌 표준망을 남보다 먼저 구축하고 확산해 대한민국이 디지털 무역 시장을 이끌어 나가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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