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정 운영 담은 37개 법안… ‘에너지·안보·성장’에 방점
“정치 싸움에 국왕 끌어들이지 마라” 버킹엄궁의 경고
영국의 정치적 심장부인 웨스트민스터궁에 묘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키어 스타머 영국 총리가 당내의 거센 사퇴 압박에 직면하며 리더십 위기에 빠진 가운데, 찰스 3세 국왕이 13일(현지시간) 의회 개회 연설인 ‘킹스 스피치’를 통해 정부의 국정 운영 청사진을 발표했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 시절 ‘퀸스 스피치’로 불렸던 이 전통은 정부가 작성한 주요 정책 과제를 국왕이 대독하는 형식으로 진행된다. 스타머 정부 출범 이후 두 번째인 이번 연설에는 국가 경제와 에너지 자립, 보안 강화를 골자로 한 총 37개의 법안이 포함됐다.
가장 눈에 띄는 대목은 국가 기간산업에 대한 통제권 강화다. 스타머 총리가 사전 예고한 대로 영국 내 마지막 용광로를 보유한 ‘브리티시 스틸’의 완전 국유화 방침이 명시됐다. 또한 경제 성장 촉진을 위해 불필요한 규제를 타파하는 ‘성장을 위한 규제 법안’과 경쟁 체제를 간소화하는 ‘경쟁 개혁 법안’이 추진된다.
대외 관계와 사회 정책에서도 변화가 감지된다. EU 규정에 맞춰 영국 규정을 조정하는 ‘유럽 파트너십 법안’을 통해 관계 개선을 꾀하는 한편, 난민 지위 획득을 까다롭게 하고 망명 신청자에 대한 세금 지원을 제한하는 ‘이민 망명 법안’도 내놓았다. 후자는 노동당 내 좌파 진영의 반발이 예상되는 대목이다.
이외에도 원전 건설을 용이하게 하는 ‘원자력 규제 법안’, 사이버 위협에 대응하는 국방 강화안, 국민보건서비스(NHS) 잉글랜드 폐지 및 임대차 제도 개편 등 광범위한 민생 법안들이 열거됐다.
화려한 예복을 입고 버킹엄궁에서 마차로 이동한 찰스 3세의 행보 뒤편에는 적지 않은 우려가 깔려 있었다. 폴리티코 유럽판에 따르면 버킹엄궁 측은 총리실에 “정치적 논란에 국왕을 이용하지 말라”는 메시지를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 내에서도 국왕이 이번 연설에 나서는 것이 적절한지에 대한 논의가 있었으나, 헌법상 국왕의 개회 선언 없이는 의정 활동이 불가능하다는 판단에 따라 강행됐다. 한 소식통은 이를 두고 “며칠 뒤면 사라질지도 모를 계획을 낭독해야 하는 국왕으로서는 망신스러운 상황”이라고 꼬집었다.
스타머 총리는 “국민은 정부가 생활비를 낮추고 안전한 나라를 만드는 등 변화를 가져오기를 원한다”며 “공약을 이행하겠다”는 말로 정면 돌파 의지를 피력했다. 자진 사퇴는 없으며, 도전자가 있다면 경선을 치르겠다는 배수진을 친 셈이다.
하지만 당내 상황은 긴박하다. 차관 4명이 연쇄 사임하고 의원의 20% 이상이 퇴진을 요구하는 가운데, ‘포스트 스타머’를 노린 움직임도 가시화되고 있다. 토니 블레어의 중도 노선을 계승한 웨스 스트리팅 보건장관이 조만간 도전장을 내밀 것으로 보이며, 앤절라 레이너 전 부총리와 에드 밀리밴드 장관 등 좌파 진영과의 다파전 양상도 점쳐진다.
정치적 불확실성은 시장에도 반영됐다. 영국 국채 10년물 금리는 한때 2008년 이후 최고치까지 치솟았다가 소폭 하락했으며, 파운드화 가치 역시 소폭 떨어지며 요동치는 영국 정국의 단면을 드러냈다.
권순욱 기자(kwonsw87@dt.co.kr)실시간 주요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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