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일(현지시간) 루마니아 수도 부쿠레슈티에서 열린 '유럽의 날' 행사에서 한 여성이 유럽연합(EU) 깃발과 풍선을 쥐고 행진하고 있습니다. AP 연합뉴스
지난 9일(현지시간) 루마니아 수도 부쿠레슈티에서 열린 '유럽의 날' 행사에서 한 여성이 유럽연합(EU) 깃발과 풍선을 쥐고 행진하고 있습니다. AP 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재집권 이후 대서양 동맹의 균열이 커지고 있는 가운데, 유럽 내부에서 새로운 유럽 방위 동맹 창설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점점 커지고 있습니다. 유럽인들이 '미국 없는 안보'라는 새로운 시대를 고민하는 모습입니다.

폴리티코 유럽판에 따르면, 아네르스 포그 라스무센 전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사무총장은 지난 8일(현지시간) 독일 일간 벨트와의 회견에서 "우리는 지금 위험한 나토의 해체 과정을 목격하고 있다"면서 새로운 유럽 방위 동맹이 필요하다고 역설했습니다. 그는 "트럼프 대통령은 (집단방위 조약인)나토 5조와 유럽 방위에 대한 미국의 헌신에 너무 많은 의구심을 제기했다"며 "유럽인들이 내릴 수 있는 결론은 유일하다. 우리는 자립해야 하고, 스스로 유럽을 방어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덴마크 총리 출신으로 2009년부터 2014년까지 제12대 나토 사무총장을 지낸 그는 "유럽연합(EU)도 나토도 동맹 내 유럽 축을 강화하는 데 현재로서는 적합하지 않다"며 유럽은 새로운 방위 계획과 새로운 군사 역량을 필요로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유럽 대륙의 방어를 독자적으로 조직할 준비와 능력을 갖춘 유럽 국가들의 모임인 '의지의 연합'(Coalition of the Willing)을 공식화할 것을 제안했습니다.

그는 "이 연합체에는 국방비를 국내총생산(GDP)의 5%까지 지출하는 나토 회원국들만 참여할 수 있어야 하며, 나토 5조와 유사한 안보 보장을 약속하고, 개별 국가가 공동의 군사 작전을 막을 수 없도록 해야 한다"는 견해를 밝혔습니다. 다만 "나토는 여전히 우리 방위의 초석으로 남을 것이라고 믿는다. 궁극적인 안보 보장은 미국의 핵우산"이라고 덧붙였습니다.

또한 라스무센 전 총장은 "우크라이나를 유럽의 새 방위 동맹의 회원국으로 통합시켜야 한다"며 "우크라이나는 빠르게 신무기와 탄약을 개발하고 있다. 우리에겐 러시아에 맞서는 방파제로 우크라이나가 필요하다"고 강조했습니다.

덴마크 총리 재임 시절 미국 주도의 이라크 전쟁을 지지하고, 나토 사무총장 재임 당시에도 동맹 내 미국의 주도적 역할을 옹호하는 등 대표적인 대서양 동맹 신봉자로 꼽히는 라스무센 전 총장은 인터뷰에서 '미국 없는 유럽 안보'를 구상해야 하는 현실을 어떻게 느끼냐는 질문에 "매우 고통스럽다"며 "어릴 때부터 미국을 존경해왔고, 미국을 자유 세계의 당연한 지도자로 여겨왔다"는 심경도 밝혔습니다.

유럽의회 초당파 의원들의 연합체도 지난 9일 '유럽의 날'을 맞아 '유럽 방위 연합'의 신속한 창설을 촉구하는 성명을 냈습니다. 이들 의원은 성명에서 "유럽 방위를 미국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것은 위험한 도박"이라고 규정하며 비상상황 발생 시 미국이 주도하는 나토 없이도 유럽 국가들이 독자적으로 행동할 수 있도록 적절한 지휘 체계, 신속대응군 등을 갖춘 새로운 조직체가 필요하다고 주장했습니다.

'유럽의 날'을 앞두고 EU가 27개 회원국 전역에서 2만6000여 명을 상대로 실시한 설문에서도 국방·안보 분야에서 EU 차원의 협력 강화를 지지하는 의견이 압도적으로 높게 나타났습니다. 응답자의 81%가 EU가 공동의 국방·안보 정책을 갖춰야 한다고 밝혔는데, 이는 지난 20년 사이 최고 수준이라고 AFP 통신은 보도했습니다.

'유럽의 날'은 유럽 통합의 출발점으로 여겨지는 '쉬망 선언'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1950년 5월 9일 프랑스 외무장관이던 로베르 쉬망은 전쟁 재발을 막기 위해 석탄과 철강 생산을 공동 관리하자고 제안했지요. 이 제안은 유럽석탄철강공동체(ECSC) 창설로 이어졌고, 유럽경제공동체(EEC)를 거쳐 오늘날 EU 탄생의 토대가 됐습니다.

박영서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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