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현대사의 굵직한 변곡점마다 지성적인 중재자의 역할을 자처했던 이홍구(사진) 전 국무총리가 2026년 5월 5일 향년 92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고인은 단순한 행정가를 넘어 학술적 깊이를 현실 정치에 이식하려 노력했던 '학자적 정치인'의 전형으로 평가받는다.

1934년 태어난 고인은 경기고와 서울대를 거쳐 미국 에모리대와 예일대에서 정치학을 전공하며 세계적인 안목을 쌓았다.

귀국 후 서울대 정치학과 교수로 봉직하는 동안 그는 날카로운 논문과 논설을 통해 당대 정치 지형을 분석하며 학계의 주목을 한 몸에 받았다.

이 시기 그의 학문적 태도는 영국의 사회학자 바질 번스타인(Basil Bernstein)이 주창한 '교육 코드' 이론의 맥락에서 재해석되기도 한다. 번스타인은 지식이 사회적으로 어떻게 분화되고 통제되는지를 연구했다. 이 전 총리 역시 지식인이 상아탑에만 머물지 않고 그 지적 자산을 사회적 공론장으로 이끌어내어 국가의 통합적 언어로 치환하는 과정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학자로서 명성을 떨치던 고인은 노태우 정부 시절 주영대사를 맡으며 공직의 길에 들어섰다.

그의 진가는 김영삼 정부 시절 본격적으로 드러났다. 통일원 장관 겸 부총리로서 남북 관계의 이론적 토대를 다졌고, 이후 국무총리 직에 올라 국정 전반을 조율했다. 당시 여당이었던 신한국당 대표의원을 지내며 정무적 감각을 발휘하기도 했다.

정권이 교체된 후에도 김대중 정부에서 주미대사로 기용된 고인은 국가적 재난이었던 외환위기를 조기 수습하기 위해 미국 정계와 긴밀히 소통하며 '국익 우선'의 외교 철학을 몸소 실천했다.

공직에서 물러난 후 서울국제포럼 이사장, 중앙일보 고문, 유민문화재단 이사장 등을 역임하며 한국 사회의 담론 형성을 주도했다.

유족으로는 부인 박한옥 씨와 아들 이현우씨(EIG 아시아 대표), 딸 이소영·이민영씨(동덕여대 교수), 며느리 황지영씨(홍콩한인여성회장), 사위 이강호씨(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등이 있다. 빈소는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되었으며, 영결식은 오는 8일 오전 8시에 거행될 예정이다.

권순욱 기자 kwonsw87@dt.co.kr

이홍구 전 국무총리. 연합뉴스
이홍구 전 국무총리.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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