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원춘 한국화학연구원 책임연구원

최원춘 한국화학연구원 책임연구원(전 한국연구재단 한계도전전략센터 책임PM)
최원춘 한국화학연구원 책임연구원(전 한국연구재단 한계도전전략센터 책임PM)

원유 한 방울 나지 않는 우리나라에서 나프타 수급 불안은 단순한 산업 이슈를 넘어 국가 경제를 흔드는 변수다. 최근 중동 지역의 지정학적 긴장으로 원유 공급 불안이 커지면서, 이 문제가 얼마나 취약한 기반 위에 놓여 있는지 다시 드러나고 있다. 이를 지켜보며 과거 나프타 분해 연구를 시작했던 시절이 떠올랐다. 당시에는 그 연구가 ‘국가적 임무’라는 자각조차 희미했지만, 20여 년이 지난 지금 그때의 기술과 경험은 에너지 수급 불안에 대응할 수 있는 현실적 수단이 되어 있다.

이 지점에서 나는 스스로에게 묻게 된다. 과연 임무중심 연구·개발(R&D)은이란 무엇이며, 어떻게 작동해야 하는가. 임무중심 R&D 흔히 정부가 제시하는 큰 목표, 즉 ‘무엇을 할 것인가(What)’에서 출발한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연구 현장에서 연구자를 버티게 하는 힘은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How)’에 대한 집요함에서 나온다.

당시 출발점은 단순했다. “나프타로부터 플라스틱의 원료가 되는 기초 화학물질인 올레핀 생산 비용이 너무 비싸다”는 산업 현장의 문제 제기였다. 우리는 이를 에너지 소모 문제로 재정의하고, 에너지 사용을 줄이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이를 위해 나프타 분해 온도를 낮춰주는 물질인 촉매와 공정 기술에 집중했다.

이처럼 문제→ 목표→ 방법으로 이어지는 구조가 명확했기에 연구는 산업적 성과로 이어질 수 있었다. 또한 기업과의 정기적인 점검 회의는 연구를 현실과 연결시키는 중요한 장치였다. 돌이켜보면 이러한 조건은 예외에 가까웠다. 명확한 문제 정의와 긴밀한 피드백 구조를 갖춘 연구는 현실에서 드물기 때문이다.

임무중심 R&D가 현장에서 구현되기 어려운 이유는 ‘시각의 차이’에 있다. 정부는 ‘에너지 수급 안정’이나 ‘탄소 배출 저감’과 같은 방향을 제시하지만, 이는 구체적 실행 수준까지는 담아내지 못한다. 반면 연구자는 자신이 잘할 수 있는 기술 문제로 접근하려는 경향이 있다. 이는 자연스러운 본능이지만,

문제는 두 시선이 연결되지 않을 때 발생한다. 정책 목표가 그대로 현장에 전달되면, 연구는 ‘임무’라는 이름 아래 분산되어 수행될 가능성이 높다. 평가와 점검이 느슨해질수록 연구는 현실 문제로부터 멀어진다.

이 간극을 메우는 역할이 ‘번역자’다. 여기서 번역자는 국가적 문제를 연구 가능한 형태로 바꾸는 전문가다. 이들은 문제를 정의하고, 이를 측정 가능한 목표로 전환하며, 다양한 기술을 하나의 방향으로 정렬해야 한다. 쉽게 말해 ‘왜 이 연구를 해야 하는가’를 ‘어떤 성능과 지표를 달성해야 하는가’로 바꿔주는 역할이다. 특히 에너지를 다루는 화학 공정 분야는 반응, 분리, 시스템 등 여러 요소가 동시에 작동해야 하므로 이를 조정하는 기능이 필수적이다.

과거 를 돌아보면, 정책과 연구 현장 간 시각 차이를 좁히는 과정을 연구 목표로 연결하는 ‘번역’ 기능이 작동했던 순간들이 있었다. 그러나 이는 제도라기보다 개인의 리더십과 우연한 협력 구조가 만들어 낸 결과에 가까웠다.

문제는 이러한 구조가 여전히 제도화되지 않아, 연구자의 헌신과 특정 여건에 기대어 성과가 만들어지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그러나 에너지 전환, 공급망 안정, 탄소 중립과 같은 과제는 실패의 비용이 국가 전체로 확산되는 영역이다. 따라서 이제 임무중심 R&D는 ‘행운’이 아니라 ‘시스템’으로 작동해야 한다.

이를 위해 몇 가지 정책적 보완이 필요하다. 첫째, 연구 과제를 기획·관리하는 책임자(PM·PD) 제도를 강화해 기술과 산업을 이해하고 문제를 재정의할 수 있는 전문가에게 권한을 부여해야 한다. 둘째, 기술 중심이 아닌 문제 정의 중심의 R&D 기획 체계로 전환해야 한다. 셋째, 짧은 주기의 점검과 피드백을 통해 연구가 실제 문제 해결과 연결되어 있는지 지속적으로 확인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산업과 연구 간 협력을 제도화해 해결해야 할 문제를 정의하는 단계부터 기업이 참여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결국 임무중심 R&D의 핵심은 거창한 목표가 아니라 ‘문제와 기술의 정밀한 연결’이다. ‘하고 싶은 연구’는 동력이지만 ‘풀어야 할 문제’는 방향이다. 이 둘을 이어주는 ‘번역의 시스템’이 없다면 R&D는 성과로 이어지기 어렵다. 나프타 이슈는 우리 R&D가 현실과 얼마나 연결되어 있는지를 묻는 질문이다. 이제 그 질문에 답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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