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미나이가 그린 일러스트
제미나이가 그린 일러스트

중국 명나라 제13대 황제 만력제(萬曆帝). 중국사 전체를 통틀어 최악의 암군(暗君)을 꼽을 때 수위권을 다투는 인물이다. 30년 가까이 정사를 돌보지 않고 파업에 돌입한 이른바 '태정(怠政)'으로 명나라 멸망의 실질적 원흉이 됐다. 오죽하면 <명사(明史)>에 "명나라는 실로 만력 때 망했다"고 적혀 있을까.

그런데 이 끔찍한 황제가 압록강 이남에서는 완전히 다른 대접을 받는다. 임진왜란 당시 망해가는 조선을 구하기 위해 신하들의 맹렬한 반대를 무릅쓰고 병력과 쌀 100만석(약 9만t)을 쏟아부어 주었기 때문이다. 자기 나라 국고가 파탄 나고 북방에서 여진족(청나라)이 거대한 폭풍처럼 성장하는 와중에도 그는 오직 '조선 구하기'에 진심이었다. 명나라 입장에서는 나라를 말아먹은 원수였지만, 조선 입장에서는 망해가는 나라를 다시 살려준 '재조지은(再造之恩)'의 은혜로운 '조선천자'였다.

지금 대한민국 정치판을 들여다보면 만력제의 영혼이 부활한 것만 같은 기시감이 든다. 바로 장동혁 국민의힘 대표다.

최근 공개된 4월 4주차 전국지표조사(NBS)에서 국민의힘 지지율은 15%로 추락했다. 2020년 9월 '국민의힘' 당명 변경 이후 최저치다.

반면 이재명 대통령 국정운영 긍정평가는 69%, 더불어민주당 지지도는 48%를 기록했다. 지방선거와 재보궐선거가 불과 한달여 앞으로 다가온 가운데 당 지도부가 골든타임을 허비하며 노출한 내홍의 상처다.

상처를 수습해도 모자랄 판에 터진 방미 후폭풍과 이어진 당내 파열음은 장 대표의 행보가 단순한 태정을 넘어 혼군(昏君)의 망동(妄動)에 이르렀음을 보여준다. 선거를 코앞에 두고 8박 10일간 미국으로 훌쩍 떠나버린 행위 자체도 문제지만, 귀국 일정을 연기하면서까지 만난 인물이 미 국무부 차관보가 아닌 '차관 비서실장'이었음이 드러났다. 그 뒷모습 사진 한 장을 외교 성과로 포장하려 했던 거짓 브리핑 논란은 상황 파악조차 못 하고 엉뚱한 곳에서 헛심을 쓰는 적나라한 현실 도피다.

당내에서는 이미 지도부의 권위가 소멸했다는 탄식이 쏟아진다. 오세훈 서울시장과 주호영 의원 등 광역단체장 후보들과 중진들이 연일 2선 후퇴와 거취 결단을 압박하고 나섰다. 장 대표는 사퇴론을 일축하며 "후보자라도 즉시 교체하겠다"고 엄포를 놓았지만, "집 밖에서 무능한 가장이 집안에 와서 행패를 부리는 모양새"라는 당내 맹비난만 자초했을 뿐이다. 5월 14일 후보 등록 시점을 전후로 지역별 '독자 선대위'를 꾸리며 각자도생에 나선 풍경은, 황제가 조회에 나오지 않자 끼리끼리 파벌을 지어 정치를 하던 명나라 말기 동림당(東林黨) 관료들을 연상케 한다.

그렇다면 장동혁 체제의 이 태정과 망동이 내려주는 '재조지은'의 은혜를 입고 있는 현대판 조선은 어디일까. 당연히 민주당이다.

일찌감치 16개 광역단체장 공천을 마무리한 민주당은 장 대표가 미국에서 차관 비서실장의 뒤통수 사진이나 찍어오고 한때 자신의 정치적 구심점이었던 한동훈을 제명하며 자중지란을 일으키는 과정을 여유롭게 지켜보고 있다.

만력제가 명나라의 국고를 털어 조선을 배 불렸듯 장 대표는 보수 진영이 가진 최소한의 정치적 자산마저 남김없이 소진하며 여권의 지지율 곳간을 채워주고 있는 셈이다. 이쯤 되면 여당 지지층 사이에서 장 대표를 '민주당의 천자'로 모셔야 한다는 우스갯소리가 나와도 이상할 게 없다.

하지만 이 기막힌 평행이론에는 한 가지 치명적인 차이가 존재한다. 만력제는 신하들과 치열하게 기싸움을 벌이며 '정치적 의도'를 가지고 조선 파병을 선택했다. 그에게는 최소한 제국의 위엄을 과시하겠다는 본인만의 명분이 있었다. 그래서 조선 사대부들은 명이 망한 뒤에도 수백 년간 '만동묘(萬東廟)'를 지어놓고 제사를 모시며 그를 기렸다.

반면 장 대표의 행보에는 상대 당을 이롭게 하려는 어떤 고도의 의도나 계산도 엿보이지 않는다. 그저 무능과 실기, 현실 도피가 겹겹이 쌓여 만들어낸 맹목적인 결과일 뿐이다. 의도 없이 상대를 돕는 지도자는 자신의 실패를 멈출 브레이크조차 찾지 못한다. 게다가 이재명 정부나 민주당 지지자들이 훗날 장 대표의 은혜를 기리며 여의도 한복판에 사당을 지어줄 리도 만무하다.

결국 장 대표는 자당에는 회복 불가능한 상처를 남기고, 상대 당으로부터는 조롱 섞인 박수만 받다가 잊힐 공산이 크다. 역사는 "명 멸망의 씨앗이 이미 만력 연간에 뿌려졌다"고 평가하고 있다. 훗날의 한국 정치사 역시 '국민의힘은 6·3 지방선거 투표함이 열리기도 전에 장동혁 체제의 기이한 태정 속에서 이미 붕괴했다'고 기록할지도 모른다.

김윤정 기자 kking152@d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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