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장 종전 된다 해도 복구에 긴 시간 필요

공급망 고리 단절에 산업과 일상 전반 타격

에너지는 물론 제조·의료·여행 동시 충격

빈곤층부터 고통 확대, 전세계로 확산 예고

호르무즈해협 근처에 머무르고 있는 선박. 로이터 연합뉴스
호르무즈해협 근처에 머무르고 있는 선박. 로이터 연합뉴스

이란이 극적으로 이슬라마바드에 협상단을 보내기로 하면서 미국과 이란의 2차 종전협상이 일단 열릴 것으로 기대되지만 이번 전쟁으로 세계 경제는 이미 큰 상흔을 입었다.

중동 전쟁으로 촉발된 에너지 공급 부족이 아시아 전역을 강타하며 세계 경제 전반으로 확산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이 같은 상황을 뉴욕타임스(NYT)는 20일 우려 섞인 시각으로 보도했다. 이번 전쟁이 시작됐을 당시 중동 에너지 의존이 높은 아시아 각국은 대규모 석유·가스 공급 차질이 점진적으로 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상했지만 실제 충격은 훨씬 빠르고 강하게 나타나고 있다고 NYT는 전했다. 현재 아시아·태평양 지역 국가들은 코로나19 팬데믹에 비견될 정도의 혼란을 겪고 있다는 것이다. 공장 가동 중단, 물류 지연, 생활 필수품 품절, 항공편 취소 등 일상 전반에서 위기가 현실화되고 있다.

화석연료에서 원재료를 뽑아내는 플라스틱 제품, 그것과 직·간접 관련이 있는 백신과 주사기, 즉석 식품, 반도체와 스포츠웨어 등 그동안 쉽게 구할 수 있었던 제품들까지 공급 차질이 빚어지고 있다. 전문가들은 호르무즈해협이 몇 주만 더 차질을 빚고 불확실성이 지속될 경우 일부 국가는 사회 불안과 경기 침체에 빠질 수 있다고 경고한다.

기업들은 연쇄적인 공급망 붕괴 속에서 도산 위기에 몰리고 있다. 각국 정부는 물가 상승을 억제하기 위해 막대한 부채를 떠안고 있다. 국제기구들은 최악의 경우 올해 말까지 수백만 명이 빈곤층으로 전락할 수 있다고 전망한다.

글로벌 경제 역시 이미 둔화 조짐을 보이고 있다. 세계 화석연료의 약 5분의 1이 전쟁 이후 시장에서 이탈하면서 에너지 가격과 생산 전반에 부담이 가중됐기 때문이다.

아시아가 특히 큰 타격을 받는 이유는 구조적 취약성 때문이다. 이 지역은 중동산 에너지 의존도가 높고, 국경을 넘나드는 복잡한 공급망 역시 화석연료에 크게 의존한다. 여기에 전쟁 이전부터 전력 수요가 공급을 앞지르는 상황이 이어지면서 충격이 증폭됐다. 중국 등 일부 국가는 상대적으로 높은 비축량과 재정 여력을 갖추고 있으나, 지역 전체로 보면 미국이나 유럽에 맞먹는 경제 규모를 가진 아시아 국가들이 광범위하게 압박을 받고 있다.

특히 운송 부문은 가장 먼저 타격을 입었다. 전쟁 발발 직후 아시아 전역에서 항공·해운·육상 운송이 급격히 위축됐고, 항공업계는 사실상 혼란 상태에 빠졌다. 지난 3월 전 세계 항공편 취소는 9만2000편을 넘었다. 이 가운데 상당수가 아시아·태평양 지역에 집중됐다. 항공유 가격 급등과 공급 불안으로 주요 항공사들은 노선을 대폭 축소하거나 중단하고 있다. 일부 저가 항공사는 생존 자체가 위협받고 있으며, 항공 수요는 이미 3분의 1가량 감소한 것으로 추정된다.

운송 차질은 관광과 서비스업에도 직격탄이 됐다. 항공료가 세 배 가까이 급등하면서 호텔과 여행업, 외식업은 수요 붕괴를 겪고 있다. 호주 내륙이나 히말라야 산악 지역 같은 외딴 지역은 더욱 고립되고 있으며, 일부 지역 호텔의 객실 점유율은 80~90% 급감했다.

제조업 역시 심각한 위기에 직면했다. 아시아 주요 수출 산업은 중동산 에너지와 원자재에 크게 의존하는데, 전쟁 7주 만에 재고가 바닥나면서 생산 축소가 잇따르고 있다. 인도네시아의 니켈 산업은 천연가스와 황 부족으로 생산량을 최소 10% 줄였고, 방글라데시 의류 산업은 원자재 가격 급등과 공급 지연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석유에서 파생되는 폴리에스터와 나일론 생산 차질도 이어지며 글로벌 의류 공급망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반도체 산업도 긴장 상태다. 반도체 제조에 필요한 헬륨의 주요 공급국인 카타르가 공격으로 생산을 중단하면서 가격이 급등했고, 일부 아시아 기업들은 생산 조정과 공급선 재편을 검토하고 있다. 공급망 병목은 연쇄적으로 확산돼 플라스틱 부족으로 화장품 생산이 줄고, 비료 부족으로 베트남의 쌀 생산이 위협받는 등 다양한 산업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 같은 경제 충격은 곧바로 시민들의 삶을 압박하고 있다. 유엔은 최근 보고서에서 전쟁 장기화 시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최대 880만 명이 빈곤에 빠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특히 사회 안전망이 취약한 국가에서는 의약품과 백신 공급 차질, 교육 중단, 환경 오염 증가 등 복합적인 위기가 나타나고 있다.

인도에서는 연료 부족으로 산업 단지가 멈춰서면서 노동자들이 도시를 떠나 농촌으로 돌아가고 있으며, 필리핀에서는 연료 가격 급등에 항의하는 운송 노동자들의 파업이 이어지고 있다. 생활비 상승과 소득 감소가 동시에 진행되면서 서민층의 타격이 커지고 있다.

전문가들은 이번 위기가 단기간에 해소되기 어렵다고 본다. 설령 휴전이 성사되더라도 에너지 생산과 운송 체계가 전쟁 이전 수준으로 회복되기까지는 수년이 걸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이미 시작된 공급 부족과 인플레이션 압력은 관성처럼 지속되며 세계 경제 전반으로 확산될 가능성이 크다.

석유와 천연가스라는 에너지와 기초 재료의 공급 부족이 촉발한 이번 충격은 아시이에 국한하지 않고 글로벌 시스템의 취약성을 드러내고 있다. 중동전이 지속되고 석유시설 복구가 지연될 경우 아시아에서 시작된 공급망 붕괴와 물가 상승은 세계 경제를 또 한 번 중대한 변곡점으로 몰아 넣을 것으로 보인다.

이규화 대기자(david@d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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