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급망 위기에 VAT·ASML 등 '도미노 영향'
시장 지위 절대적… 韓업체 사업 계획도 흔들
무협 "헬륨·브롬 등 핵심 소재 공급차질 우려"
중동전으로 인한 공급망 리스크가 글로벌 반도체 밸류체인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중동산 공급망 차질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는 있었지만, 반도체 장비 업체가 실적발표에서 이를 공식적으로 언급한 적은 사실상 없었다.
수십개의 공정이 24시간 연속 가동하는 반도체의 특성상 잠깐이라도 생산이 멈추면 수천억원의 손실이 발생한다. 특히 극자외선노광장비(EUV) 독점 생산 기업 ASML과 같은 곳에서 공급 차질이 발생하면 전 세계 첨단 반도체 생산라인은 증설 차질 등의 위기에 직면한다.
업계는 중동발 공급망 위기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반도체 완제품 제조사에까지 영향을 미칠 가능성에 주목하고 있다. 국내 반도체 업계는 2019년에도 일본의 반도체·디스플레이 3대 핵심소재 수출 제한으로 고전한 적이 있다.
14일 미 일간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최근 스위스 반도체 부품·장비 제조업체 VAT 그룹은 중동 지역 분쟁에 따른 공급망 차질로 올해 1분기 매출이 기존보다 감소할 것으로 예상된다고 밝혔다.
회사는 당초 2억4000만~2억6000만스위스프랑(약 3600억원~3900억원)으로 제시했던 매출 가이던스를 약 2억1500만스위스프랑(약 3225억원) 수준으로 약 10~17%가량 낮췄다.
회사 측은 이란을 둘러싼 중동 지역 긴장 고조로 일부 핵심 부품과 소재의 운송이 지연되면서 장비 생산 일정에도 차질이 발생했다고 설명했다. 이로 인해 고객사에 대한 제품 인도 시점이 늦어졌고, 이 영향이 실적에 반영된 것으로 나타났다.
VAT는 반도체 공정에 필수인 진공 밸브 장비 시장 1위 업체로 70% 안팎의 점유율을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ASML을 비롯해 세계 1위 장비 제조사인 어플라이드 머티어리얼즈, 삼성전자의 주요 협력사로 꼽히는 램리서치 등 주요 반도체 장비 업체를 고객사로 두고 있다.
이 가운데 ASML은 반도체 회로선을 그리는 EUV 시장에서 절대적인 지위를 가지고 있다. 대당 수천억원에 이르면서도 연간 생산량이 50여대에 불과하기 때문에, 만약 VAT 생산 차질이 ASML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하면 이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사업 계획에도 큰 영향을 준다.
다만 현재까지 직접적인 생산 차질이 확인된 것은 아니며, 단기 영향은 제한적일 수 있다는 분석도 있다. 이와 관련해 VAT는 "현재 발생한 매출 감소는 수요 위축이 아닌 공급망 병목에 따른 일시적 영향"이라며 "지연된 물량은 2분기 이후 순차적으로 반영될 것"이라고 밝혔다.
중동발 공급망 위기 조짐은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한국무역협회는 최근 보고서에서 원유와 나프타 외에도 헬륨, 브롬, 암모니아 등 중동 의존도가 높은 일부 소재에 대한 공급 차질 가능성을 짚었다.
반도체, 디스플레이 제조 과정의 냉각재로 쓰이는 헬륨은 천연가스 처리 과정의 부산물로 추출되는 중간재로, 지난해 한국이 수입한 헬륨 가운데 가장 많은 64.7%는 카타르에서 들여왔다.
국내 기업들은 소재 수급 다변화로 중동발 생산차질이 발생하지 않도록 한다는 방침이지만, 파장이 부품·장비 업계까지 확산할 경우 영향에서 벗어나긴 어렵다.
진실 무협 선임연구위원은 "이번 중동발 충격은 산지 집중과 해상 병목이 결합한 구조적 공급 충격으로 단순 다변화 대응에 한계가 있다"며 "핵심 공정은 회수·재사용 등 자립형 공정으로 전환하고, 에너지 자립 관련 기술은 국가 안보 필수 기술로 지정해 지원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상현 기자 ishsy@d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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