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폭동 이후 절실함으로 정치권에 입성

‘선거의 여왕’에서 ‘트럼프의 복심’으로

이재명 정부 ‘실용 노선’과 충돌 가능성

친근한 얼굴을 한 냉철한 대리인일 수도

미셸 박 스틸 미 연방 하원의원. LOS ANGELES TIMES/AP 연합뉴스
미셸 박 스틸 미 연방 하원의원. LOS ANGELES TIMES/AP 연합뉴스

미셸 박 스틸 주한미국대사

서울에서 태어나 LA 폭동을 겪고 미국 연방 하원의원에 오른 미셸 박 스틸(70·사진·한국명 박은주). 트럼프 2기 행정부의 첫 주한 미국대사로 지명된 스틸 지명자의 삶은 그 자체로 ‘코리안 아메리칸’의 역동성을 상징한다. 하지만 이제 그는 ‘트럼프의 복심’이라는 무거운 임무를 받고 서울로 돌아온다.

스틸 지명자는 1955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아버지를 따라 일본에서 거주하며 국제적인 감각과 여러 국가의 언어를 익혔고, 1975년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이주했다. 평범한 주부이자 사업가였던 그의 삶을 바꾼 결정적 사건은 1992년 로스앤젤레스(LA) 폭동이었다. 당시 한인 사회가 정치적 보호막 없이 무력하게 무너지는 모습을 보며 그는 “누군가는 우리를 대신해 목소리를 내야 한다”는 절실함으로 정치권에 발을 들였다.

이후 캘리포니아주 조세형평국 위원, 오렌지카운티 슈퍼바이저 등 지역 정계에서 탄탄한 입지를 다졌다.

2006년부터 2024년까지 치러진 수많은 선거에서 단 한 번을 제외하고 모두 승리하며 ‘선거의 여왕’이라는 수식어를 얻었다. 2021년에는 한국계 여성 최초로 연방 하원에 입성하며 한인 정치사의 새 지평을 열었다. 그의 당선은 단순히 개인의 영달을 넘어 미주 한인 사회가 중앙 정치 무대에서 실질적인 영향력을 확보했음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2024년 11월 선거에서 600여표 차이로 석패했으나, 선거 직전 트럼프 대통령의 공식 지지를 받는 등 공화당 내 입지가 탄탄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스틸 지명자는 공화당 내에서도 가장 선명한 보수주의자로 분류된다. 낮은 세금, 규제 완화, 법치주의와 전통적 가치 수호를 외치며 트럼프 대통령의 ‘마가(MAGA·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기조에 적극 동참해 왔다. 특히 트럼프 대통령은 그를 “공산주의를 겪어본, 미국 우선주의를 가장 잘 이해하는 애국자”라며 공개적으로 신뢰를 표해왔다.

그의 대중국 강경 노선은 선명하다. 하원 재임 시절 ‘미중 전략경쟁 특위’ 위원으로 활동하며 공급망 분리와 중국의 영향력 억제를 강력히 주장했다. 이는 트럼프 2기 행정부가 구상하는 인도-태평양 전략의 핵심 브레인 역할을 수행할 준비가 되었음을 시사한다. 그는 단순한 외교관을 넘어, 미국의 안보 가치를 최전선에서 방어하는 ‘여전사’의 정체성을 공유하고 있다.

청와대 관계자는 이날 “스틸 내정자가 향후 정식으로 임명되면 한미관계 강화와 양국 국민 간 우정 증진 등에 크게 기여할 것으로 기대한다”고 밝혔다.

하지만 스틸의 주한대사 부임은 이재명 정부에 정교한 고차 방정식을 던지고 있다.

우선 대북 정책에 있어서 충돌 지점이 있다. 이재명 정부가 남북 간 긴장 완화와 적대 행위 중단을 통한 제도적 평화를 추구하는 반면, 스틸 지명자는 북한 인권과 핵 위협에 대해 타협 없는 원칙론을 고수해 왔다. 만약 트럼프 대통령이 북한과 직접 대화에 나서더라도, 현장에서 정책을 집행할 스틸 지명자는 한국 정부의 유화적 접근이 미국의 안보 이익과 배치되지 않는지 엄격한 잣대로 감시하는 역할을 할 것으로 보인다.

가장 첨예한 대립이 예상되는 지점은 대중국 노선이다. 이재명 정부는 상호존중과 정경분리 원칙에 따라 중국과의 경제 협력을 복원하고 전략적 자율성을 확보하려 한다. 그러나 대표적 대중 강경파인 스틸 지명자는 미국의 대중국 공급망 봉쇄 전략에 한국이 적극 동참할 것을 강력히 요구할 것으로 전망된다. 특히 일본 거주 경험을 바탕으로 한미일 3국의 공조를 중시하고 있어 한국 정부가 중국에 대해 선명한 입장을 취하도록 압박하는 ‘경고등’ 역할을 자임할 가능성도 있다.

스틸 지명자는 미 상원 인준을 통과하면 성 김 전 대사에 이어 두 번째 한국계 주한미대사가 된다. 1년 넘게 비어있던 대사직에 무게감 있는 정치인이 낙점된 것은 트럼프 행정부가 한국을 결코 가볍게 보지 않는다는 신호다. 하지만 그 비중만큼 한국 정부가 짊어져야 할 외교적 무게 또한 무거워졌다.

스틸은 가장 친근한 한국인의 얼굴로 다가와, 가장 냉철한 미국의 이익을 요구할 것이다. 70세의 베테랑 정치인이 펼칠 서울에서의 외교 드라마는 이제 시작이다. 이재명 정부가 표방하는 ‘실용’이 미국의 ‘우선주의’와 어떻게 교집합을 찾아낼지, 그 치열한 협상의 과정은 2026년 한반도 정세의 향방을 결정지을 중대한 이정표가 될 것이다. 그는 한국과 미국의 가교가 될 수도, 혹은 가장 넘기 힘든 거대한 산이 될 수도 있다.

권순욱 기자 kwonsw87@d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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