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데스, 총선서 199개 의석 중 55석 획득 ‘참패’

건건이 EU 정책에 몽니 부려온 친러 정권 퇴각

유럽 ‘극우’ 상징… 트럼프 대통령과도 돈독해

오르반 패배로 유럽 우파 포퓰리즘 물결에 제동

헝가리 총선에서 패배한 빅토로 오르반 총리. 로이터 연합뉴스
헝가리 총선에서 패배한 빅토로 오르반 총리. 로이터 연합뉴스

빅토르 오르반 헝가리 총리

유럽의 ‘스트롱맨’이자 유럽연합(EU) 노선의 비협조자로서 16년간 헝가리를 철권통치해 온 빅토르 오르반 총리가 마침내 권좌에서 물러난다.

헝가리 국가선거위원회에 따르면 지난 12일(현지시간) 치러진 총선에서 오르반 총리가 이끄는 집권 여당 피데스(Fidesz)는 전체 199개 의석 중 단 55석을 확보하는 데 그치며 궤멸적인 참패를 당했다.

반면 오르반의 독주를 막기 위해 결집한 야당 ‘티서’(Tisza)는 전체의 3분의 2를 넘어서는 138석을 휩쓸며 헝가리 정치사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개표율 97.74% 상황에서 오르반 총리는 “선거 결과는 고통스럽지만 모호하지 않다”며 패배를 공식 인정했다.

이로써 2010년부터 이어져 온 그의 장기 집권은 종지부를 찍게 됐다. 이번 선거 결과는 헝가리의 정권 교체를 넘어, 그간 EU 내부에서 ‘트로이의 목마’ 역할을 하며 사사건건 통합의 발목을 잡아온 친러시아·극우 성향의 정권이 퇴각했다는 점에서 유럽 정세에 지각변동을 예고하고 있다.

오르반 총리는 집권 기간 내내 서방 진영의 이단아로 군림해 왔다.

그는 ‘비자유주의적 민주주의’(Illiberal Democracy)를 표방하며 사법부의 독립성을 훼손하고 언론을 장악하는 등 민주주의 가치를 후퇴시켰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특히 대외 정책에 있어서 그는 ‘친미이면서 동시에 친러’라는 매우 독특하고 기묘한 이중 노선을 걸었다.

그는 나토(NATO) 회원국임에도 불구하고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각별한 밀착 관계를 유지하며 유럽의 대러시아 제재와 우크라이나 지원안에 대해 상습적으로 거부권을 행사해 왔다.

뉴욕타임스(NYT)의 분석에 따르면 오르반은 러시아로부터 저렴한 에너지를 공급받아 국내 지지 기반을 공고히 하는 한편, 이를 지렛대 삼아 EU로부터 더 많은 경제적 이득을 얻어내려는 고도의 실리 외교를 펼쳤다. 하지만 이러한 행보는 EU 내 다른 회원국들로부터 “공동체의 가치를 배신하고 독재자의 편에 섰다”는 격렬한 비난을 불러일으켰고, 결과적으로 헝가리는 유럽 내에서 고립된 섬과 같은 처지가 됐다.

오르반의 정치 스타일은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과 놀라울 정도로 닮았다.

두 정치인은 자국 우선주의, 강경한 반이민 정책, 기득권 엘리트층에 대한 적대감이라는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다. 특히 오르반은 ‘유럽판 트럼프’로 불리며 트럼프와의 돈독한 우의를 과시해 왔다. 트럼프 대통령과 오르반 총리는 전통적인 자유주의 국제 질서를 부정하고 강력한 개인적 리더십을 중시한다는 점에서 서로의 거울과 같은 존재였다. 이 때문에 트럼프는 이번 선거 과정에서도 소셜미디어를 통해 오르반을 공개 지지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연대도 헝가리 내부의 부패 스캔들과 살인적인 물가 상승이라는 경제난 앞에서는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특히 선거 직전 헝가리 외무장관이 러시아 측과 EU의 기밀 회의 내용을 공유했다는 녹취록이 폭로되면서, 오르반 정권의 도덕성은 회복 불가능한 타격을 입었다. 로이터통신은 이번 선거 결과가 오르반의 독단적인 친러 행보에 지친 헝가리 국민들이 결국 ‘유럽으로의 귀환’을 선택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야당 티서의 머저르 페테르 대표는 승리 확정 직후 “헝가리는 이제 EU와 나토의 강력하고 신뢰할 수 있는 동맹이 될 것”이라고 선언하며 오르반 체제와의 완전한 결별을 선포했다.

티서가 확보한 138석은 헌법 개정까지 가능한 ‘매직 넘버’로, 그동안 오르반이 왜곡해 놓은 정치·사회 시스템을 근본적으로 개혁할 수 있는 강력한 동력을 부여한다.

오르반의 패배에 유럽 각국 정상들은 일제히 환영의 뜻을 나타냈다. AFP통신의 보도에 따르면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EU 집행위원장은 “헝가리가 마침내 유럽으로의 길을 되찾았다”며 기쁨을 감추지 않았고,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 역시 이번 결과가 유럽의 보편적 가치가 승리한 역사적 사건이라고 치하했다.

특히 그동안 헝가리의 반대로 동결되었던 EU의 지원금이 다시 풀릴 가능성이 커지면서 시장에서는 헝가리 경제 회복에 대한 기대감이 고조되고 있으며, 중장기적으로는 유로화 도입 논의도 급물살을 탈 것으로 전망된다.

무엇보다 오르반의 퇴장은 최근 유럽 전역을 휩쓸고 있던 우파 포퓰리즘 물결에 상당한 제동을 걸 것으로 보인다.

오르반은 유럽 내 ‘극우’ 세력들에게 일종의 ‘롤모델’이자 구심점 역할을 해왔기 때문이다. 영국 가디언에 따르면 전문가들은 오르반의 실각이 이탈리아, 프랑스, 독일 등지에서 세력을 확장하던 극우 정당들에게 “장기 집권과 독단적 정치는 결국 국민의 심판을 받는다”는 강력한 경고 메시지가 될 것이라고 분석했다.

16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유럽의 골칫거리이자 독불장군으로 군림했던 오르반의 시대가 저물면서, 헝가리는 이제 친러시아에서 벗어나 다시 유럽 통합의 일원으로 복귀하는 중대한 전환점을 맞게 됐다. 우크라이나 전쟁 지원에 탄력이 붙고 유럽의 단결이 공고해질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이규화 대기자 david@d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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