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서곤 한국산업기술진흥협회 상임부회장
정부의 전략적 지원과 제도적 기반 위에 민간 기업의 기술개발 역량이 결합하면서, 우리 산업은 추격 단계를 넘어 세계 시장 진출과 기술 자립을 동시에 달성해왔다. 반도체 D램, CDMA 이동통신 등 그간 정부와 민간이 협력해 만들어낸 대표적인 성과들은 우리 산업과 경제 구조를 근본적으로 바꿔놓은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최근 정부가 연구·개발(R&D) 지원사업의 다양한 성과들을 적극 발굴하고 있는데, 이를 보면 정부 지원이 기술 축적과 산업 확장으로 이어지는 구조가 여전히 유효함을 확인할 수 있다. R&D를 통해 해외 의존도가 높은 기술의 국산화에 성공하거나, 연구 성과가 매출과 투자로 이어져 기업 성장으로 연결되는 것이다. 나아가 미래 산업 진입을 위한 기술 기반 확보로 연결되는 선순환이 형성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성과에도 불구하고, 기업을 둘러싼 환경은 갈수록 빠르게 악화되고 있는 상황이다. 기업의 R&D는 장기 투자 성격이 강해 불확실성이 커질수록 후순위로 밀리기 쉬운데, 글로벌 공급망 재편과 경기 둔화 등 다양한 요인이 기업의 투자 여력을 제약하고 있다.
한국산업기술진흥협회의 최근 조사에 따르면, 실제로 R&D를 축소하려는 기업의 절반이 경영환경 악화를 주요 이유로 꼽고 있다. 이는 기술개발이 기업 의지와 무관하게 위축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기업들이 체감하는 어려움의 지점도 변화하고 있다. 과거에는 기술 확보 자체가 핵심 과제였다면, 이제는 확보된 기술을 사업으로 연결하는 과정이 더 큰 부담으로 작용한다. 기술 이전, 실증, 인프라 구축 등 활용 단계에서 제약이 발생할 경우 연구 성과는 시장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단절될 가능성이 높다. 이는 산업 전반의 혁신 효율성을 저하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
이러한 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국가 R&D 지원사업의 방향도 재정립되어야 한다. 민간의 투자 여력이 충분할 때 정부는 혁신을 촉진하는 역할을 수행하지만, 투자 환경이 악화된 상황에서는 R&D 기반을 유지하는 역할이 더 중요하다. 특히 중소기업의 경우 R&D가 중단되면 기술과 인력, 그간 쌓아온 역량까지 동시에 약화될 수 있어 정책적 보조가 더욱 절실해진다.
이에 따라 앞으로의 정책은 몇 가지 원칙에 기반해 추진될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 R&D가 단절되지 않도록 하는 지속성 확보가 중요하다. 기술 경쟁력은 단기간의 성과가 아니라 연구와 경험의 축적을 통해 형성되기 때문이다. 또한 연구 성과가 산업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기술개발과 사업화, 시장 진출 간 연결성을 강화해야 한다.
아울러 산업 현장의 수요를 반영한 정책 설계를 통해 R&D 투자의 실효성을 높일 필요가 있다. 한국산업기술진흥협회는 산업계 기술 수요를 국가 R&D 예산에 반영하기 위해 ‘민간R&D협의체’를 운영하며 민관 협력을 강화하고 있다. 앞으로도 협력 기반을 확대하여 기업의 목소리가 정책에 반영될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다.
이와 함께 기술개발을 수행하는 인력에 대한 관심도 필요하다. R&D의 성과는 결국 사람을 통해 만들어지며, 지속적인 혁신 역시 인력의 역량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때마침 올해부터 ‘기술개발인의 날’이 국가기념일로 제정되었으니, 기술개발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가 확산되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한다.
결국 정부 R&D 지원은 단순한 재정 투입이 아니라 산업 기반을 유지하기 위한 핵심 정책 수단이다. 변화된 환경 속에서 정부의 역할은 더욱 중요해지고 있다. 지금과 같은 불확실성의 시대에서, 정부 R&D 지원사업이 산업을 성장시키는 것을 넘어 경쟁력이 흔들리지 않도록 지탱하는 기반으로 자리 잡기를 바란다.
실시간 주요뉴스
기사 추천
- 추천해요 0
- 좋아요 0
- 감동이에요 0
- 화나요 0
- 슬퍼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