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환 KAIST 경영공학부 교수
대한민국 기업의 임직원들에 회장, 사장, 부문장 등 고위 결정권자에게 올리는 ‘보고’는 단순한 업무 공유를 넘어 생존이 걸린 중차대한 이벤트다. 보고서의 자구, 그래프의 모양 하나까지 완벽을 기하기 위해 실무자들은 밤을 지새우고, 보고 직전까지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린다. 상사의 질문에 막힘없이 답하기 위해 예상 질문과 답변 리스트를 최대한 준비하는 모습은 우리 기업 현장의 일상적인 풍경이다.
그러나 냉정하게 질문해봐야 한다. 이토록 많은 자원과 감정을 소모하는 ‘보고’가 과연 디지털 전환, 인공지능(AI) 인텔리전스 시대의 기업 경쟁력에 얼마나 기여하고 있는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제는 ‘보고를 줄여야 기업이 산다’는 사고가 절실히 필요한 시점이다.
전통적인 보고 체계는 철저하게 수직적 위계를 전제로 한다. 상사가 과제를 부여하면 부하는 이를 수행하고, 그 경과와 결과를 다시 상사에게 보고하여 피드백을 받는 구조다. 이 시스템이 작동하려면 한 가지 전제가 필요하다. ‘보고를 받는 자가 보고를 하는 자보다 더 많은 지식, 정확한 정보, 풍부한 경험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래야만 보고 과정에서 상사가 실무자의 결과물에 가치(Value)를 더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디지털과 AI가 지배하는 오늘날, 이 전제는 처참히 무너지고 있다. 기술의 변화 속도가 개인이 습득할 수 있는 학습의 임계점을 넘어섰고, 현장의 실무자가 쥐고 있는 데이터의 선명도는 결코 상급자의 과거 경험으로 대체될 수 없다. 상사가 더 이상 실무자보다 절대적으로 똑똑할 수 없는 구조적 환경에서, 과거 방식의 보고는 단순히 ‘검사’와 ‘컨펌’을 위한 형식적 절차로 전락하며 업무 효율을 저해할 뿐이다.
과거 기업들은 업무 효율성 극대화나 엄격한 품질 관리와 같은 특유의 축적된 레거시를 철저히 유지하는 능력만으로도 ‘전략적 해자’를 구축하고 경쟁우위를 지켜낼 수 있었다. 그러나 디지털 환경에서는 다양한 형태의 전통적 해자가 쉽게 허물어진다. AI가 최적화를 담당하고 글로벌 플랫폼이 인프라를 평준화한 시대에, 기업이 지속적으로 진화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길은 구성원들이 가진 파편화된 지식과 창의적인 정보를 유기적으로 결합해 ‘전에 없던 가치’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수직적인 보고보다 수평적인 ‘협업’과 ‘조율’이 더 중요하다.
예컨대 많은 기업이 AI와 DX를 외치며 거액을 투자하지만, 조직의 심장부라 할 수 있는 경영진의 ‘의사결정 방식’과 ‘소통 관행’이 바뀌지 않는 한 변화 관리는 실패하기 십상이다. 디지털 도구를 도입하고서도 여전히 층층시하 상급자를 위한 보고가 일종의 통과의식처럼 줄을 잇고 결재라인을 따라 수직적으로 소통하는 구태의연한 방식으로는 디지털 시대의 속도를 따라잡을 수 없다. 이 시대의 진정한 성공은 보고서에 담은 수려한 내용 못지않게, 보고보다는 위임과 자율을 중시하는 ‘문화’로부터 시작될 수 있다.
마이크로소프트를 화려하게 부활시킨 사티아나델라 회장은 “회의를 어떻게 운영하는가(How do you run a meeting?)”라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더 많이 듣고(Listen more), 더 적게 말하며(Talk less), 때가 되었을 때 단호히 결정한다(Be decisive when the time comes).”
상급자가 보고 자리에서 자신의 존재감과 권위를 뽐내기 위해 말을 많이 하는 순간, 보고는 ‘훈시’가 되고 실무자의 창의성은 죽는다. 경영자의 역할은 실무자의 보고서에서 허점과 오류를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현장의 목소리를 경청하고 수렴하여 기업의 존재 목적과 명확한 미래 비전을 제시하는 데 방점이 찍혀져야 한다. 나침반이 명확할 때, 구성원들은 보고를 위해 시간을 허비하는 대신 자율성을 바탕으로 가치 창출에 몰입할 수 있다.
보고를 줄인다는 것은 업무를 방치한다는 뜻이 아니다. 정보가 실시간으로 공유되는 대시보드를 구축하고, 격식 없는 소통을 활성화하며, 실무자에게 권한을 대폭 이양하는 것을 의미한다.
대한민국 기업들이 AI 시대의 거센 파고를 넘기 위해서는 ‘보고를 위한 보고’라는 낡은 닻을 과감히 잘라내야 한다. 임직원의 에너지를 상사의 비위를 맞추는 보고서 작성이 아니라, 고객을 위한 가치 창출과 미래 전략 수립에 쏟게 해야 한다. 보고 체계의 슬림화는 이제 선택이 아닌, 생존을 위한 필수 전략이 됐다. 경영진이 먼저 보고를 거부하고 질문을 시작할 때, 비로서 기업 조직에는 훨씬 더 강한 근육이 생기고 힘찬 혈기가 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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