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일 산업부장
지방선거보다 중동 전쟁에 온통 관심이 쏠려있는 요즘, 국내에서 황당한 일이 벌어졌다. 일부 시민단체들이 용인 반도체 산단의 새만금 이전을 유도하는 설문조사를 한 것이다.
설문조사 결과 ‘전력이 풍부한 지역으로 반도체 산단 이전’에 찬성하는 응답률이 53.5%였다고 한다. 이를 근거로 더불어민주당 전북도지사 경선 후보자인 안호영 의원은 “삼성 반도체 팹 1~2기 새만금 유치를 대한민국 산업 전략의 새로운 대안으로 끝까지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그러자 이상일 경기 용인특례시장은 “용인 반도체 흔들기 목적의 기획조사”라며 강하게 반발하고 나섰다.
특정 정당이나 지역을 옹호하고자 하는 생각은 없다. 필자는 다만 반도체를 정치적으로, 특히 선거판에 이용하면 안된다는 글을 여러차례 썼다. 그 이유도 여러차례 얘기했다. 미국과 중국, 일본을 비롯해 세계 열강들은 지금 반도체 경쟁력을 높이려고 국력을 총동원하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관세를 무기로 반도체 기업에 자국 공장 건설을 압박하고 있다.
반도체 기업들은 괴롭다. 다른 나라였으면 융숭한 대접을 받았을텐데, 우리나라에 있다는 이유로 소위 ‘감 놔라 배 놔라’ 하는 정치권의 흔들기에 속수무책이다.
반도체 호남 유치론 주장에는 여러 논리가 있지만, 그 핵심은 ‘지역균형발전’이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올해 영업이익이 200조가 넘을 것이라니, 세수와 일자리 측면에서 당연히 탐날 만 하다.
허나 공장만 가져온다고 될 일이 아니다. 지역에 넘치는 신재생에너지를 쓴다고 해도 그게 일정하리라는 보장이 없다. 24시간 가동하는 반도체 공장의 특성을 안다면, 불안정한 신재생에너지 때문에 잠깐이라도 공장이 멈췄을 경우 발생하는 수백억원의 손실도 알 것이다. 제조 공정에 사용될 엄청난 담수 조달도 당연히 문제이고, 연계되는 부품·소재·장비 생태계의 이전도 난제로 꼽힌다.
가장 큰 문제는 우수한 반도체 인재들을 평택과 청주로 이어지는 남방 한계선 밑으로 어떻게 끌어올 수 있는지다. 수억원의 연봉을 받는 인재들이 좋은 동네에 가정을 이루고 자녀들을 좋은 학교로 보내고 싶을텐데, 그러려면 적어도 서울에 있는 우수한 학교들을 새만금이나 그 인근으로 대거 이동시켜야 한다.
하지만 지역균형발전을 주장하는 정치인들 중 자신의 모교를 지방으로 옮겨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은 거의 본 적이 없다. 예를 들어 서울대를 새만금으로 옮긴다면 반도체 인재 유치에 도움이 될 수 있겠지만, 누구도 이 판도라의 상자를 건드리지 않는다.
아직 학연, 지연의 영향력이 남아있는 우리 사회에서 자신의 모교를 지방으로 옮기자고 주장하는 정치인이 나온다면, 그는 동문들의 쏟아지는 비난을 피할 길이 없을 것이다.
사실 부동산 문제, 빈부격차 문제 등 대한민국이 처한 여러 사회 갈등의 뿌리에는 ‘학벌’이 있다. 진학률이 좋은 고등학교나 학원가가 있는 지역은 집 값이 비싸고, 해당 지역에는 공공임대주택을 지을 엄두도 내지 못하는 게 현실이다.
모두 다 잘 사는 나라는 분명 바람직한 사회다. 그러나 이는 기업을 강제로 옮긴다고 될 일이 아니다. 정·관계 고위층이 솔선수범하는 게 우선이다. 국회를 지방으로 옮기고, 청와대도 지방으로 옮기고, 본인의 집도 지방으로 옮겨야 한다.
과거 평기자로 국회에 출입하던 시절의 일이다. 지금은 기업인이 된 한 전 국회의원이 지역구 출마를 위해 서울 변두리 지역으로 거주지를 옮겼다가 임기가 끝나자 곧바로 서울 중심가로 돌아갔던 기억이 있다. 나중에 알아보니 해당 의원은 재임 중에도 그 집에 거의 오지 않았다고 하는데, 그게 사실이든 아니든 지역구 거주자로 참 씁쓸했던 기억이 있다.
다시 강조하지만, 반도체는 한국 수출의 30%를 차지하는 국가 핵심 산업이다. 대한민국의 메모리반도체가 없으면 정부의 ‘AI 3강’ 전략에도 차질이 생긴다. 선거에서 이기겠다고 황금알 낳는 거위의 배를 가르는 우를 범해서는 안될 것이다.
박정일 산업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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