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너지 안보·탈탄소화 위해 원자력 재평가 확산
佛, 원전 선도국가로 발돋움·獨, 후회 속 체코에 의지
유럽 대부분 국가, 탈원전 폐기하고 원전으로 회귀
전 세계적으로 에너지 주권 확보와 기후 위기 대응이 국가 생존의 최우선 과제로 부상하면서, 유럽 대륙에 ‘원자력 르네상스’라 불릴 만큼 강력한 원전 부활의 바람이 불고 있다. 원자력 강국 프랑스가 주도하는 대규모 에너지 정책 전환 속에, 과거 탈원전을 선택했던 국가들도 속속 과거의 결정을 뒤집고 있다. 반면, 이미 탈원전을 완수한 독일은 정책적 과오를 인정하면서도 현실적 복귀가 불가능한 상황에 처해 깊은 고민에 빠졌다.
현지시간 10일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제2회 민간원자력 정상회의는 유럽의 에너지 정책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자리였다. 이날 개막 연설에 나선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원자력을 단순한 발전 수단이 아닌 “인류 진보와 경제적 번영의 근간”으로 정의하며 원전 생태계의 대대적인 활성화를 촉구했다.
마크롱 대통령은 현재의 국제 지정학적 위기가 에너지 시장에 미치는 악영향을 강하게 경고했다. 그는 “탄화수소(화석연료)에 지나치게 의존할 경우, 그것이 국가를 압박하고 불안정하게 만드는 도구로 악용될 수 있음을 목격하고 있다”며 중동 분쟁으로 인한 국제 유가 급등을 지적했다. 이어 원자력만이 에너지 독립과 탄소 중립, 그리고 양질의 일자리 창출이라는 세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을 수 있는 유일한 대안임을 역설했다.
특히 마크롱 대통령은 차세대 기술인 소형 모듈형 원자로(SMR)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국가 간 표준화를 통해 공동 개발을 용이하게 함으로써 유럽이 미국, 중국 등과의 기술 경쟁에서 밀리지 않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우라늄 공급망을 다각화하고, 한국이나 일본처럼 방사성 폐기물 처리 기술이 뛰어난 국가들과의 기술 협력도 주요 과제로 제시했다.
유럽연합(EU)의 변화도 파격적이다.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EU 집행위원장은 유럽이 저탄소 에너지원인 원자력을 외면해온 것을 두고 “전략적 실수”였다고 시인했다. 그는 2030년대 초까지 EU 내에서 SMR을 실용화하기 위한 새로운 전략을 발표했으며, 배출권 거래 제도에서 조달한 자금을 바탕으로 약 2억유로(3400억원) 규모의 투자 보증 프로그램을 시행하겠다고 밝혔다.
이러한 유럽의 원전 부흥 흐름 속에서 독일은 다소 고립된 모습이다. 같은 날 프리드리히 메르츠 독일 총리는 안드레이 바비시 체코 총리와의 공동 기자회견에서 독일 탈원전 정책에 대한 유감을 표명했다. 그는 폰데어라이엔 위원장의 ‘전략적 실수’ 발언에 개인적으로 동의한다면서도, “이전 정부가 내린 결정은 돌이킬 수 없는 현실”이라고 토로했다.
독일은 한때 전력의 3분의 1을 원전에 의존했으나, 2011년 후쿠시마 사고를 계기로 탈원전을 선언하고 지난해 4월 마지막 원전 3기의 가동을 전면 중단했다. 하지만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천연가스 공급에 차질이 생기고, 풍력과 태양열 등 재생에너지의 불규칙한 발전량이 문제가 되면서 에너지 안보에 비상이 걸렸다.
메르츠 총리는 탈원전 재검토를 주장했지만 현실적으로는 불가능에 가깝다고 판단하고 있다. 이미 해체 작업이 진행 중인 원전을 재가동하는 데는 신규 건설에 맞먹는 비용과 시간이 투입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결국 독일은 부족한 전력을 이웃 나라 체코 등으로부터 수입하거나 전력망을 확충하는 등 정책 최적화에 집중하고 있다. 독일의 에너지 파트너인 체코는 2040년까지 원전 비중을 68%까지 끌어올릴 계획이다.
현재 대부분 유럽 국가들은 독일과는 상반된 길을 걷고 있다. 세계 최초로 탈원전을 공식화했던 이탈리아는 내년까지 원전 재개를 위한 법적·기술적 기반을 마련하기로 최근 결정했다. 체르노빌 사고 이후 가졌던 원자력에 대한 공포보다 에너지 안보의 시급성이 더 크다고 판단한 것이다.
벨기에 역시 지난해 의회 의결을 통해 탈원전 정책을 공식 폐기했으며, 스웨덴과 폴란드는 대규모 원전 증설과 신규 건설 프로젝트를 가동 중이다.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에너지의 무기화’를 경험한 유럽 국가들에게 원자력은 이제 단순한 선택지가 아닌 생존을 위한 필수 전략이 되었다.
이번 파리 정상회의에는 한국을 포함한 38개국 대표단과 IAEA 등 국제기구들이 참석해 원자력 발전의 가치를 재확인했다. 에너지 주권 확보를 향한 유럽의 고군분투 속에서, 원자력을 둘러싼 각국의 전략적 선택은 향후 수십 년간 글로벌 경제와 산업 지형을 결정짓는 핵심 변수가 될 것으로 전망된다.
권순욱 기자(kwonsw87@dt.co.kr)실시간 주요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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