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순욱 부국장 겸 정치부장
심판은 끝났지만 책임은 시작되지도 않았다. 윤석열 전 대통령과 장동혁 국민의힘 대표 이야기다.
한때 ‘공정과 상식’이라는 시대적 화두를 던지며 서슬 퍼런 칼날을 휘두르던 윤 전 대통령에 대해 법원이 비록 1심이기는 하지만 내란 혐의를 인정하고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선고 이후 많은 국민들은 윤 전 대통령의 진솔한 사과와 장 대표의 처절한 고백을 듣고 싶었다.
그러나 기대는 배반으로 돌아왔다. 선고 직후 발표된 사과문은 처연(凄然)했으나, 그 속에 담긴 문장들은 국민들이 받은 상처를 어루만지기엔 너무나 가벼웠다. 진실이 거세된 수사(修辭)는 반성이 아니다. 또 다른 형태의 자기방어일 뿐이다. 우리는 지금 한 지도자의 몰락이 아니라, 그가 무너뜨린 국가적 가치와 보수 정치의 잔해를 목격하고 있다.
역사는 반복된다. 1974년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은 ‘워터게이트’로 물러나며 “나의 결정이 국가의 이익에 부합하길 바란다”는 모호한 말을 남겼다. 도청이라는 파렴치한 범죄 행위를 ‘국익’ 뒤에 숨긴 비겁한 언설이었다. 반면 1970년 빌리 브란트 서독 총리는 바르샤바 유대인 위령비 앞의 비에 젖은 바닥에서 말없이 무릎을 꿇었다. 구구절절한 문장보다 강력했던 그 ‘무거운 침묵의 사죄’가 독일을 다시 유럽의 중심에 세웠다.
윤 전 대통령의 사과문에서 우리는 브란트의 참회 대신 닉슨의 변명을 본다. 사법부 판단을 탓하며 자기 변명으로 일관하고 있다. 헌정 질서를 흔든 본질적 과오를 ‘구국의 결단’이라는 유치한 소영웅주의로 비켜갔다. 과거 전두환 씨가 백담사로 떠나며 남긴 “모든 게 내 탓”이라는 말보다도 울림이 적다. 책임은 미루고 공(功)은 독차지하려 했던 권력의 본성이 마지막 순간까지도 문장 사이를 기회주의적으로 배회하고 있다.
더욱 처참한 것은 국힘 장동혁 대표의 모습이다. 내란 우두머리 혐의로 무기징역이라는 사법부의 준엄한 심판이 내려졌음에도, 장 대표는 “아직 1심일 뿐”이라며 무죄 추정의 원칙을 전면에 내세웠다. 판사 출신인 그가 법리의 방패 뒤로 숨어 ‘윤 절연’이라는 시대적 요구를 외면하는 모습은 비겁함을 넘어 처량하기까지 하다. ‘정치적 책임’과 ‘법적 책임’을 구분하지 못하는 정무 감각으로 제1 야당을 이끌고 있으니 국힘이 지금 이 모양 이 꼴일 수밖에 없다.
장 대표는 “절연을 말하는 것이 분열의 씨앗”이라며 이른바 ‘윤 어게인’ 세력을 포용해야 한다고 강변한다. 그러나 이는 포용이 아니라 ‘동반 자살’이다. 헌법을 부정한 세력과 결별하지 못하는 정당은 이미 공당(公黨)으로서의 자격을 상실한 것이다. 당의 지도자가 독배(毒杯)를 든 전임 대통령과 몸을 꽁꽁 묶어버린 채 “함께 죽자”고 외치는 판국에, 어느 중도 유권자가 보수에게 표를 주겠는가. 장 대표의 무기력한 리더십은 국힘을 ‘영혼 없는 좀비 정당’으로 전락시켰다.
이대로라면 향후 보수 세력의 재기는 불가능하다. 이번 지방선거는 더불어민주당이 기고만장하여 아주 큰 실수를 하는 등의 변수가 없는 한, 국힘 참패로 마무리될 것이다. 그 참패는 예고편에 불과하다. 책임과 염치라는 보수의 핵심 가치를 잃어버린 국힘은 처절하게 버림받을 것이다. 민주당의 반영구집권 도우미 세력으로 거듭날 것이다. 그리하여 죽었으되 죽지 않은 좀비처럼 대한민국 보수세력을 참칭하며 지금보다 더 깊은 수렁에 빠트릴 것이다.
지도자의 가치는 권력을 내려놓고 심판대에 섰을 때 증명된다. 아우구스투스는 임종 전 “내가 연극을 잘 해냈느냐”고 물었다. 윤 전 대통령과 장 대표의 말 어디에도 아우구스투스와 같은 책임감은 1도 없다.
역사는 냉정하다. 무기징역이라는 사법적 단죄보다 무서운 것은 영원히 닫히지 않을 ‘기억의 감옥’이다. 진실을 외면한 공허한 사과문과 절연을 거부한 무책임한 정당은 그 감옥의 문을 결코 열 수 없을 것이다. 보수의 궤멸은 타인에 의한 것이 아니라, 끝내 고개 숙이지 않은 윤 전 대통령의 ‘오만함’과 그 오만에 기생한 장 대표의 ‘비겁함’, 여전히 이들에게 희망을 걸고 있는 국힘 일부 당원들과 지지자들의 ‘오기’에서 시작되었다고 역사는 기록할 것이다.
권순욱 부국장 겸 정치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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