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 반도체부터 다양한 가전 신제품, 전자 산업 현장에서 보고 듣고 느낀 이야기들을 수첩에 옮기듯 기록하는 코너입니다. 일반 소비자의 입장에서 궁금했던 신제품의 후기나, 기술·산업의 뒷이야기를 전해드리고자 합니다.

6세대 고대역폭메모리(HBM4) 납품이 본격화되는 시점이 다가오면서 메모리 업계의 시선은 다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로 모이고 있다. 인공지능(AI) 서버 투자 확대와 함께 HBM이 사실상 ‘AI 시대의 필수 인프라’로 자리 잡은 만큼, 차세대 제품인 HBM4의 성패는 양사의 중장기 경쟁 구도를 가를 분기점으로 여겨진다.

흥미로운 점은 HBM4를 두고 삼성과 SK하이닉스 모두 이례적일 만큼 자신감을 숨기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그간 HBM 시장에서는 ‘선두 SK하이닉스, 추격 삼성전자’라는 구도가 비교적 명확했지만, 최근 양사의 메시지를 종합해 보면 단순한 추격과 수성의 대립이라기보다는, 서로 다른 계산법을 가진 동상이몽에 가깝다는 인상을 준다.

이 같은 분위기는 최근 진행한 양사의 2025년 실적 콘퍼런스콜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났다. 두 회사 모두 HBM을 실적 개선의 핵심 축으로 언급했고, HBM4를 둘러싼 준비 상황과 시장 전망을 비교적 상세히 설명했다. 다만 강조점은 확연히 달랐다.

먼저 삼성전자는 이번 콘퍼런스콜에서 유독 기술 준비도와 제품 로드맵을 반복적으로 언급했다. 회사 측은 HBM4와 관련해 “고객 요구에 맞춘 제품 개발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는 취지의 설명을 여러 차례 내놓았고, 공정 안정화와 수율 개선에 대한 언급도 빠지지 않았다. 특정 고객사나 공급 일정에 대해 직접적인 표현을 자제하면서도 기술적 준비가 상당 부분 궤도에 올랐다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데 주력했다.

삼성전자 HBM4의 데이터 처리 속도는 최대 11.7Gbps(초당 기가비트)로, JEDEC 표준(8Gbps)을 크게 웃도는 것으로 전해졌다.

이는 그간 삼성전자가 HBM 시장에서 받아왔던 평가를 의식한 행보로도 읽힌다. 삼성은 범용 D램과 낸드플래시에서는 압도적인 존재감을 유지해왔지만, HBM에서는 ‘기술은 있으나 시장 대응이 늦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HBM3와 HBM3E 국면에서 고객 확보 속도가 기대에 못 미쳤다는 점도 부담으로 작용했다. 이번 HBM4를 앞두고 삼성이 유례없이 자신감을 내비치는 배경에는 단순한 성능 경쟁을 넘어 시장 인식을 바꾸겠다는 의지가 깔려 있다는 해석이 나온다.

업계에서는 삼성전자가 HBM4를 계기로 단순 추격자가 아닌, 구도 재편의 한 축으로 올라서려 한다는 분석도 조심스럽게 제기된다. HBM4부터는 고객 맞춤형 설계 비중이 더 커지고, 인터페이스와 전력 효율 등에서 새로운 요구사항이 늘어나는 만큼, 기존 판을 흔들 수 있는 여지가 있다는 이유에서다.

업계 관계자는 “삼성이 ‘이번에는 다르다’라는 메시지를 유독 강조하는 것 같다”라고 언급했다.

반면 SK하이닉스의 자신감은 결이 다르다. SK하이닉스는 콘퍼런스콜에서 HBM 사업을 “이미 검증된 성장 동력”으로 표현하며, 양산 경험과 고객 협업 이력을 강점으로 내세웠다. HBM3와 HBM3E를 거치며 확보한 레퍼런스가 HBM4에서도 자연스럽게 이어질 것이라는 설명이다. 회사 측은 주요 AI 고객사와의 관계가 여전히 견고하다는 점을 여러 차례 강조하면서, HBM4 시장에서도 리더십을 이어나가겠다는 자신감을 보였다.

눈에 띄는 부분은 SK하이닉스가 HBM을 단순한 고부가 제품이 아니라 장기적이고 구조적인 사업 축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점이다. 수요 변동에 따라 공격적으로 물량을 늘리기보다는 고객 일정에 맞춘 안정적인 공급과 품질 관리에 초점을 맞추는 모습이다. 이는 ‘많이 파는 HBM’보다 ‘문제없이 공급하는 HBM’이 더 중요해진 시장 환경을 반영한 전략으로 보인다.

이 같은 차이는 HBM4를 바라보는 양사의 전략적 위치에서 비롯된다. 삼성전자가 HBM4를 ‘역전의 계기’로 삼으려 한다면, SK하이닉스는 이를 ‘수성의 연장선’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된다. 삼성은 기술 완성도와 포트폴리오 확장을 통해 고객 선택지를 넓히려 하고, SK하이닉스는 이미 형성된 신뢰와 경험을 바탕으로 현재의 우위를 이어가겠다는 계산이다. 이번 실적발표 콘퍼런스 콜에서도 SK하이닉스는 대량 공급 및 초기 양산 안정성을 강조하는 모습이었다.

다만 HBM4 시장이 양사의 기대대로 흘러갈지는 아직 단정하기 어렵다. HBM은 이제 단순한 메모리 성능 경쟁을 넘어, 고객 맞춤 설계 능력과 일정 관리, 장기 공급 안정성까지 함께 평가받는 시장이 됐기 때문이다. 수율이 조금 높다고 해서, 혹은 성능 수치가 소폭 앞선다고 해서 곧바로 고객 선택으로 이어지지 않는 구조다.

이 때문에 업계에서는 HBM 경쟁을 두고 “기술보다 신뢰의 싸움”이라는 표현도 나온다. 특히 AI 서버 시장에서는 단 한 번의 공급 차질이 고객 전체 일정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만큼, 메모리 업체에 요구되는 기준도 이전보다 훨씬 엄격해졌다. 삼성과 SK하이닉스 모두 자신감을 보이고 있지만, 그 자신감의 성격이 서로 다르다는 점이 향후 경쟁의 관전 포인트가 될 가능성이 크다.

HBM4는 단순한 차세대 제품이 아니다. 삼성전자에게는 그간의 평가를 뒤집을 수 있는 시험대이고, SK하이닉스에게는 선두 자리를 굳힐 수 있는 검증 무대가 될 전망이다.

제미나이가 그린 일러스트.
제미나이가 그린 일러스트.
이상현 기자(ishsy@d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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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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