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 AI 기업 81% “데이터가 가장 큰 애로”

한은 “데이터 병목이 산업 경쟁력 제약”

[한국은행 제공]
[한국은행 제공]

인공지능(AI)이 신약 개발과 정밀의료의 속도를 좌우하는 시대가 됐지만 국내 바이오헬스 산업의 핵심 자산인 ‘바이오 데이터’는 제대로 쓰이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왔다. 세계 최고 수준의 건강보험·임상 데이터 인프라를 갖추고도 실제 산업 경쟁력으로 이어지지 못하면서 신성장동력으로 기대되는 바이오헬스 분야가 구조적 한계에 부딪히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은행이 9일 발표한 ‘첨단 바이오헬스 산업 육성방안–바이오 데이터 활용 기반 구축을 중심으로’ 보고서에 따르면 2023년 기준 국내 의료·헬스케어 AI 기업의 81.4%가 데이터 확보·품질 문제를 주요 애로사항으로 지목했다.

병원 데이터를 연구 목적으로 외부와 공유한 비율은 약 20% 수준에 그쳤다. 2020년 10월부터 2023년 10월까지 3년간 보건의료 분야 데이터 결합·활용 건수는 78건에 불과했다. 대규모 데이터를 보유하고도 정제·공유·결합 단계에서 병목이 발생하며 활용이 제한되고 있다는 의미다.

바이오헬스 산업은 저성장 국면에서 구조적으로 성장 여력이 큰 분야로 평가된다. 고령화에 따른 의료 수요 증가와 생명공학과 AI의 융합 가속화로 향후 5년간 글로벌 바이오헬스 시장은 연평균 5.0% 성장할 것으로 전망된다. 이는 국내 주력 산업인 자동차 산업의 성장률(2.7%)의 약 두 배에 달하는 수치다. 전 세계 의료비 지출 역시 주요국을 중심으로 견조한 증가세를 이어가고 있다.

하지만 뚜렷한 시장 성장성에도 불구하고 한국 바이오헬스 산업은 구조적 한계를 안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국내 산업은 그간 바이오시밀러와 위탁개발생산(CDMO) 등 틈새시장을 중심으로 빠르게 성장해왔지만 고부가가치를 창출하는 혁신 신약과 첨단 의료기기 분야에서는 여전히 선도국과의 격차가 큰것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세계 매출 상위 30위 내에 포함된 국내 바이오헬스 기업은 없고 국내 1위 기업의 매출 규모도 글로벌 상위 제약사 평균의 5% 수준에 그친다.

한은은 최근 AI 기술이 신약 개발과 의료기기 분야의 경쟁 구도를 재편하는 ‘게임체인저’로 부상하면서 이런 구조적 한계를 넘어설 기회가 열리고 있다고 평가했다. AI는 신약 개발 기간을 30~50% 단축하고 연구개발 비용을 절감하는 동시에 정밀의료와 수술 보조 로봇 등 새로운 시장을 창출할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닌 것으로 분석됐다. 한국은 미국 특허청 기준 AI 특허 출원 건수와 FDA 승인 AI 의료기기 건수에서 모두 세계 4위를 기록했고 서울은 글로벌 임상시험 유치 규모에서 세계 2위 수준의 인프라를 보유하고 있다.

다만 보고서는 이러한 기술적 잠재력이 산업 성과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바이오 데이터 활용 구조 개선이 선결 과제라고 지적했다. 단일 건강보험제도를 기반으로 5000만 인구의 건강보험 및 병원 임상 데이터를 보유하고 있음에도 데이터 제공에 따른 위험과 비용은 정보주체인 개인과 수집관리자인 병원이 부담하는 반면 활용에 따른 이익은 기업과 사회 전체로 분산되는 ‘인센티브 불일치’ 구조가 데이터 활용을 제약하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데이터 제공 의향이 있다는 응답은 26.9%에 그쳤고 제공을 꺼리는 이유로는 개인정보 유출 우려와 고용·보험 등에서의 차별 가능성이 주로 꼽혔다. 병원 역시 데이터 정제 비용과 법적·평판 리스크에 비해 보상이 제한적이어서 데이터 공유를 기피하는 것이 합리적인 선택이 되고 있다고 한은은 설명했다.

한은은 이런 구조적 문제를 해소하기 위한 방안으로 ‘국가 승인형 바이오 데이터 개방 체계’ 도입을 제안했다. 공익성이 인정된 연구에 대해 국가가 사전 심의·승인을 통해 데이터 활용을 허용하고 승인된 연구에는 사전 동의 면제 등 규제를 완화하는 방식이다. 동시에 정보주체에게는 활용 거부나 재허용이 가능한 통제권을 부여하고 병원 등 데이터 제공 주체에는 합리적 보상 체계를 마련해 신뢰 기반의 데이터 유통 생태계를 구축해야 한다는 구상이다. 보고서는 이러한 정책이 도입될 경우 데이터 제공 의향이 최대 15.5%포인트 확대될 수 있다고 분석했다.

성원 한은 경제연구원 미시제도연구실 과장은 “AI 시대에 바이오 데이터는 단순한 연구 자원이 아니라 국가 경쟁력을 좌우하는 전략 자산”이라며 “공익성을 전제로 한 국가 승인형 개방 체계를 통해 인센티브를 재설계하지 않으면 세계적 수준의 데이터 인프라도 산업 성장으로 연결되기 어렵다”고 말했다.

유진아 기자(gnyu4@d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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