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서 논설위원
반세기 넘게 이어져 온 핵 억제 질서의 마지막 안전핀이 풀렸다. 미국과 러시아 간 유일한 핵 군축 협정인 신전략무기감축조약(New START·뉴스타트)이 종료된 것이다. 세계는 다시 '제한 없는 핵 경쟁'의 문 앞에 서게 됐다. 어렵게 유지돼 온 상호 통제의 틀은 사라졌고, 그 자리를 불신과 핵 경쟁이 대신하는 분위기다.
1945년 8월 6일 미군 B-29 폭격기가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을 투하했다. 원폭의 엄청난 파괴력은 핵 경쟁에 불을 당겼다. 4년 후인 1949년 8월 소련도 핵을 만들어냈다. 예상보다 빨랐던 소련의 핵 개발에 미국은 경악했다. 영국도 독자 개발에 나서 1952년 세 번째로 핵클럽에 가입했다.
그러자 미국은 원폭보다 수천배 위력을 가진 수소폭탄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미국은 1952년 11월 태평양 마셜제도 환초섬 일루겔렙에서 수소폭탄 실험에 성공했다. 일루겔렙섬이 통째로 지도에서 사라졌다. 소련도 1953년 수소폭탄 개발에 성공했고, 8년 뒤인 1961년 10월 역사상 가장 강력한 폭탄 '차르 봄바'를 선보였다. '차르 봄바'는 히로시마 원폭보다 3800배 이상 강했다. 당시 충격파는 지구를 7바퀴 반이나 회전했다.
이렇게 치열하게 핵무기 경쟁을 벌이던 미국과 소련이 '협력'이란 단어를 진지하게 떠올리게 된 계기가 찾아왔다. 그것은 1962년 가을의 '쿠바 미사일 위기'였다. 세계는 핵전쟁 직전까지 몰렸었다. 협상 끝에 소련은 쿠바에서, 미국은 터키(튀르키예)에서 핵무기를 각각 철수하기로 합의하면서 파국을 피했다
이 위기는 한 가지 교훈을 남겼다. 핵무기가 공멸의 촉매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1969년 미·소 간 전략무기제한협정(SALT) 협상이 시작됐고 1972년 협정이 체결됐다. 그러나 목표는 핵무기 '감축'이 아닌 '제한'에 그쳤다. 전환점은 1980년대였다. 1987년 12월 미·소 간 중거리핵전력조약(INF)이 체결되면서 실질적 군축의 길이 열렸다. 사거리 500~5500㎞의 지상발사 탄도·순항미사일을 폐기한다는 내용이었다. 이어 1991년 전략무기감축협정(START)이, 2010년엔 뉴스타트가 체결되어 감축을 제도화했다.
그러나 이번에 뉴스타트가 종료되면서 미·러 간 핵무기 통제는 진공 상태가 됐다. 수량 통제뿐 아니라 상호 신뢰와 검증 체계까지 동시에 붕괴됐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뉴스타트를 1년 더 연장하자고 제안했지만,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응하지 않았다. 미국이 연장에 소극적이었던 배경에는 중국 변수가 자리잡고 있다.
중국의 핵무기 규모는 미·러에 훨씬 못 미치는 수준이다. 하지만 최근에는 가속을 내고 있다. 스톡홀름 국제평화연구소(SIPRI)에 따르면 현재 전 세계에는 약 1만2241발의 핵탄두가 있다. 러시아가 5459발, 미국이 5177발로 전체의 87%를 차지하고 있다. 이어 중국이 약 600발을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2030년이 되면 중국의 핵무기는 1000개가 넘을 것으로 관측된다. 이런 상황에서 중국만 빼고 미국과 러시아만 뉴스타트를 유지한다면 결국에는 중국을 이롭게 한다는 것이 미국의 주장이다.
이에 미국은 지난 6일(현지시간) 미·러·중 3국이 함께 핵무기 숫자를 제한하는 새로운 핵 군축 협상을 공개 제안했다. 하지만 중국이 응할지는 불투명하고, 응하더라도 합의를 이루기까지 상당한 시일이 걸릴 것이다.
새로운 군축 체제가 필요하다는 점에는 이견이 없지만, 공백 상태의 장기화는 그 자체로 위험하다. 통제 없는 경쟁이 굳어질수록 핵 억제 균형은 더 얇은 안전판 위에 놓이게 된다. 이 불안정성은 미·러에 그치지 않는다. 북한은 핵무력의 기정사실화를 더욱 밀어붙일 명분을 얻게될 것이고, 비핵화를 요구할 국제적 설득력은 급격히 약화될 것이다. 일본의 움직임도 심상치 않다. 핵무장 논의가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는 것이다. 이런 흐름이 이어지면 동북아는 핵 억제가 아니라 핵 확산의 전면에 서게 될 것이다.
지금 다시 핵협상 테이블을 복원하지 못한다면 핵은 '억제'가 아니라 '전염'이 된다. '85초' 남은 지구 종말 시계의 초침을 되돌릴 유일한 길은 핵 통제 복원 뿐이다.
박영서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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