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재권 더밀크 대표
세계 최대 ICT 전시회 ‘CES 2026’을 마치고 실리콘밸리에서 만난 한국 최고 대학의 컴퓨터공학 전공 학생은 창업 의지로 충만했다. “무엇을 하면 실리콘밸리에서 성공할 수 있을까요?” 그가 물었다. 나는 “무엇을 해결하고 싶은가? 그것이 글로벌 스케일이면 투자받을 수도 있다”라고 답했다. 그러자 학생은 이렇게 말했다. “목표가 30대에 성공해서 조기 은퇴하고 한강뷰 아파트를 갖는 것입니다.”
순간 말문이 막혔다. 개인의 꿈을 탓할 수는 없다. 하지만 씁쓸했다. 창업이 문제 해결의 수단이 아니라 재무적 성공의 수단으로만 여겨지는 순간, 그 여정은 견디기 어려운 고통이 되기 때문이다.
정부가 발표한 ‘모두의 창업 프로젝트’는 5000명의 창업 인재를 발굴하고, 우승자에게 10억원 이상을 지원하는 야심찬 계획이다. 창업을 독려하고, 일자리를 ‘찾는 것’에서 ‘만드는 것’으로 전환하겠다는 정부의 의지는 분명하다. 창업자로서 나 역시 창업이 미래라고 믿는다. 창업 붐 자체는 환영할 일이다.
하지만 창업자로서 지난 5년을 돌아보면, 이 여정이 얼마나 힘겨운지 안다. 가장 힘든 순간은 돈이 없을 때가 아니었다. ‘왜 이걸 하고 있지?’라는 회의가 들 때였다. 목적이 명확하지 않으면, 첫 번째 위기에서 무너진다. 그래서 우려된다. 창업 지원 정책이 양적으로 확대되는 것은 좋지만, 창업이 문제 해결의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가 목적이 될 때 생기는 문제를 충분히 인식하고 있는지 의문이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인공지능(AI) 시대 창업의 변화된 본질이 충분히 강조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AI는 창업의 기술적 장벽을 급격히 낮췄다. 클로드에게 물으면 사업계획서가 나오고, 챗GPT에게 부탁하면 프로토타입 코드가 생성된다. 누구나 무언가를 만들 수 있는 시대다.
역설적으로 이것이 ‘무엇을 왜 하는가’라는 질문을 더욱 중요하게 만든다. 기술적 실행이 쉬워질수록, 진짜 경쟁력은 ‘왜 이것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답에서 나온다. AI는 아이디어를 실행해주지만, 그 아이디어를 10년간 밀고 갈 집념은 만들어주지 못한다.
실리콘밸리에서 샘 올트먼과 젠슨 황을 직접 인터뷰하며 느낀 것이 있다. 그들에게는 지금도 해결하고 싶은 절실한 문제가 있다. 더 부자가 되고 싶은 게 아니다. 올트먼은 AGI로 인류의 번영을, 황은 가속 컴퓨팅으로 과학의 한계를 돌파하려 한다.
특히 글로벌 진출을 꿈꾼다면, 목적 지향적 스토리텔링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실리콘밸리 투자자들이 가장 먼저 묻는 질문은 “무슨 문제를 풀려는가”다. 그들은 기술 스펙보다 창업자의 문제 인식과 해결 의지를 본다. 한국 스타트업이 글로벌 투자 유치에 어려움을 겪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것이다. 기술은 뛰어나지만, ‘왜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가’에 대한 설득력 있는 스토리가 약하다.
CES 같은 글로벌 무대에서도 마찬가지다. 기술 데모는 기본이고, 관건은 “이것이 왜 세상에 필요한가”를 설득하는 것이다. 한국 기업들이 기술력에 비해 주목받지 못하는 이유는, 제품 중심 사고에서 문제 중심 사고로의 전환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모두의 창업 프로젝트’가 성공하려면, 자금과 멘토링만큼 중요한 것이 있다. 창업자들이 ‘왜’를 찾도록 돕는 과정이 필요하다. 한강뷰 아파트가 아니라, 세상의 어떤 불편을 해소하고 싶은지, 어떤 가치를 만들고 싶은지 스스로 질문하게 만드는 시간 말이다.
이와 함께 실패에 대한 사회적 낙인을 없애야 한다. 한국에서 창업 실패는 ‘실패 경력서’를 발행한다고 해서 이 인식이 바뀌지 않는다. 초기 스타트업이 고객을 만날 기회를 줘야 한다. 정부와 대기업의 공공구매는 여전히 기득권 기업의 전유물이다. 멘토링이 아니라 진짜 글로벌 시장 피드백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 500명의 전문 멘토단보다 한 명의 진짜 고객이 낫다.
실리콘밸리의 본질은 ‘결심의 힘’이다. 무엇을 하겠다고 결심하면, 그것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믿음. 하지만 그 결심은 해결하고 싶은 문제에서 나와야 지속 가능하다. AI 시대일수록 창업은 목적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기술은 AI가 해결해주지만, ‘왜’는 인간만이 답할 수 있기 때문이다.
5000명의 창업 인재를 발굴하는 것도 좋다. 하지만 그들이 단순히 ‘성공한 창업자’가 아니라 ‘세상의 문제를 해결하는 창업자’가 되도록 돕는 것이 더 중요하다. 그것이 진정한 국가 창업시대를 여는 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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