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갑 떠난 돈의 새로운 행선지

화폐 부산물에서 문화 자산으로

홍콩금융관리국(HKMA)이 지폐 인쇄 과정에서 나온 파쇄 지폐조각을 투명한 아크릴 속에 담아 제작한 돼지저금통 (연출 이미지) [조폐공사 제공]
홍콩금융관리국(HKMA)이 지폐 인쇄 과정에서 나온 파쇄 지폐조각을 투명한 아크릴 속에 담아 제작한 돼지저금통 (연출 이미지) [조폐공사 제공]

지갑에서 현금이 빠르게 사라지고 있다. 식당의 키오스크와 노점상의 QR코드는 이제 일상의 풍경이 되었고, 디지털 결제가 현금 결제를 대신한 지는 이미 오래된 일이다. 한국은행 통계에 따르면 가구당 현금 보유액은 해마다 줄어들고, 지폐의 평균 수명은 오히려 길어지는 추세다. 사람들의 손길을 덜 타게 된 돈이 지갑 속에서 더 오래 머물게 된 셈이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수명을 다한 화폐의 처리 문제는 인류에게 새로운 과제를 던져주었다. 과거에는 잘게 파쇄된 지폐 조각들이 대부분 소각되어 연기로 사라지거나 땅속에 묻혔다. 하지만 환경경영이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된 지금, 이 화폐 부산물들은 독창적인 예술품과 상품으로 변신하며 제2의 생애를 시작하고 있다.

화폐 제조 과정에서 발생하는 잔여물이나 폐화폐를 재활용하려는 움직임은 이미 거대한 세계적 흐름이다. 각국 조폐기관들은 이를 단순한 쓰레기가 아니라, 국가의 정체성과 역사가 담긴 소중한 자원으로 재정의하기 시작했다. 그 면면을 살펴보면 나라마다의 문화와 고민이 고스란히 묻어난다.

재활용 분야의 선두주자는 단연 호주다. 호주 중앙은행은 세계 최초로 플라스틱 계열의 폴리머 지폐를 도입했던 경험을 살려 폐지폐를 수거해 작은 알갱이 형태인 ‘펠릿’으로 가공한다. 이 펠릿은 화분이나 산업용 부품, 심지어 공원의 야외 벤치로 다시 태어난다. 공원에 앉아 휴식을 취할 때, 내가 앉은 벤치가 사실은 수만 장의 지폐가 뭉쳐진 결과물이라는 사실을 떠올리는 것은 묘한 즐거움을 준다.

중국은 대국다운 실용성에 집중했다. 중국 인민은행은 수명이 다한 면섬유 지폐를 바이오매스 발전소의 연료로 활용하여 전기를 생산한다. 막대한 화폐 유통량을 자랑하는 국가답게, 버려지는 돈을 에너지 자원으로 치환하는 대규모 순환 시스템을 구축한 것이다.

헝가리의 사례는 더욱 따뜻하다. 헝가리 중앙은행은 폐지폐를 압축해 벽돌 형태의 연료를 만든다. 열효율이 뛰어난 이 ‘돈 벽돌’은 겨울철 저소득 가정과 복지 시설에 무료로 제공된다. 돈이 숫자로서의 가치를 잃은 뒤에도, 문자 그대로 사람들의 몸과 마음을 데워주는 온기가 되어 돌아오는 셈이다.

홍콩의 사례는 위트와 상징성이 돋보인다. 홍콩 금융관리국(HKMA)이 출시한 투명 돼지저금통은 동전 대신 폐지폐 파쇄물로 가득 채워져 있다. 동양 문화권에서 재물운의 상징인 돼지 안에, 비록 지금은 형체를 알 수 없이 잘린 조각일지언정 한때 누군가의 소중한 자산이었던 화폐의 흔적을 담아낸 것이다. 소비자들은 이 저금통을 통해 화폐의 긴 여정을 상상하며 ‘부의 축적’이라는 메시지를 시각적으로 즐긴다. 화폐가 가진 권위를 내려놓고 친근한 일상 소품으로 다가간 영리한 기획이다.

한국조폐공사가 시판중인 권종별(1000원권, 5000원권, 만원권, 5만원권) 한장 분량의 화폐 부산물이 보이는 ‘클리어형 돈볼펜’ (실사 이미지) [조폐공사 제공]
한국조폐공사가 시판중인 권종별(1000원권, 5000원권, 만원권, 5만원권) 한장 분량의 화폐 부산물이 보이는 ‘클리어형 돈볼펜’ (실사 이미지) [조폐공사 제공]

한국조폐공사 역시 이러한 세계적인 흐름에 발맞춰 지난해 2월, 세계 최초로 화폐 부산물 재활용 굿즈 브랜드인 ‘머니메이드(moneymade)’를 선보였다. 연간 100톤에 달하는 화폐 부산물을 소각하던 관행에서 벗어나, 이를 혁신적인 업사이클링 제품으로 전환하며 순환 경제의 새 장을 열었다.

반응은 뜨거웠다. 실제 지폐 1장 분량의 파쇄된 부산물이 들어간 ‘돈볼펜’은 출시와 동시에 완판 행진을 이어갔다. 5만원권 한 장 분량의 화폐 조각을 투명한 아크릴에 담아낸 ‘돈키링’은 행운을 소장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심리를 정확히 파고들었다. 분쇄된 화폐 부산물 돈가루로 만든 ‘돈봉투’는 친환경의 가치를 더했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약 500만원 상당의 화폐 부산물을 채워 넣은 원형 쿠션 ‘돈방석’과 동전 디자인을 본뜬 ‘돈지갑’, 화폐 속 인물과 유적 이야기를 담은 ‘돈달력’까지 연이어 출시되며 순식간에 동이 났다.

이는 단순히 재미있는 상품을 만드는 차원을 넘어선다. 디지털 시대에 화폐의 역할을 새롭게 정의하고, 환경 보호와 자원 순환, 그리고 새로운 경제적 가치 창출을 동시에 실현하는 모범 사례다. 이제 화폐는 물건을 사고파는 거래의 수단을 넘어, 지속 가능한 자원이자 우리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문화적 아이콘으로 다시 태어나고 있다. 버려진 돈이 만드는 이 새로운 가치는, 우리가 자원을 바라보는 관점이 어떻게 변화해야 하는지를 명확히 보여주고 있다.

우진구 한국조폐공사 화폐박물관장
우진구 한국조폐공사 화폐박물관장
세종=강승구 기자(kang@d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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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승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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