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관 블루포인트파트너스 대표
1997년 카이스트 물리학 박사과정 시절, 실험실 해외 기자재가 고장 날 때마다 수리에 애를 먹었다. 의욕이 넘쳤던 필자는 “우리가 직접 국산 장비를 만들면 어떨까요”라고 교수님께 제안했고, “그럼 네가 만들어보라”는 답을 들었다. 그렇게 첫 창업이 시작됐다. 하지만 기술에 대한 확신만 있었을 뿐, 시장이 원하는 것은 몰랐다. 사업화 전략 없이 시작한 회사는 2년 만에 문을 닫았다.
두 번째 창업도 비슷했다. 반도체 공정용 플라스마 기술은 있었지만, 사업 모델을 잘못 잡아 6년 넘게 정체기를 겪었다. 플라스마 발생 모듈을 만들었지만 시장 수요는 따로 있었다. 제어 장치로 방향을 전환한 뒤에야 삼성전자를 고객사로 확보했고, 결국 엑시트에 성공했다. 제품을 만들고 나서야 고객을 찾기 시작했고, 그제야 방향을 수정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연구실 밖을 조금이라도 빨리 알 수 있었더라면’, ‘누군가 시장에 대해 이야기를 해줬더라면’. 이는 결국 초기 기술 기업의 성장을 돕는 액셀러레이터(AC) 블루포인트파트너스의 설립으로 이어졌다. 블루포인트는 2014년 설립 이후 400개가 넘는 기업에 투자하고 성장을 지원하고 있지만, 여전히 많은 기술 기업들이 초기 시장을 몰라 혼란을 겪는다.
이런 고민은 텍스코어(TeX-Corps, 공공기술기반 시장연계 창업탐색 지원사업)를 알게 된 이후에는 “그때 텍스코어 같은 프로그램이 있었다면”이라는 아쉬움으로 바뀌었다. 텍스코어는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미국 국립과학재단(NSF)의 아이코어(I-Corps) 방법론을 벤치마크해 2015년부터 운영해 온 실험실 창업 지원 프로그램이다. 대학의 연구원들이 사업화 이전에 시장을 경험해 볼 수 있는 값진 경험을 제공한다고 할 수 있다.
텍스코어는 주로 대학원생을 대상으로 한다. 학생들은 아직 사회적 직책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교원이나 연구원에 비해 비즈니스를 배우면서 빠르게 성장할 수 있는 적합한 자원이다. 참가자들에게 창업을 강요하지 않는다는 점도 재밌다. 오히려 이런 심리적 안전망 속에서 참가자들은 더 과감하게 시장을 탐색하고, 피드백을 온전히 받아들인다. 창업하지 않기로 결정한 이들도 시장 검증 경험 자체가 큰 자산이 된다.
텍스코어 출신 기업에는 ‘비즈니스 밸런스’라는 공통점이 있다. 기술 전문성과 시장에 대한 이해가 균형을 이룬 팀들이 다수다. 지난 10년간 762팀, 2000여 명이 과정을 수료한 가운데 약 400개 기업이 실제로 창업으로 이어진 가운데 블루포인트도 디든로보틱스, 리플라, 페리지에어로스페이스 등 텍스코어 출신 기업들에 꾸준히 투자해왔다.
일부 팀에게는 미국 현지 시장 검증 기회를 제공하며, 창업 이전에 글로벌 감각을 키울 수 있게 돕는다. 참가자들은 실리콘밸리나 보스턴 등지에서 잠재 고객과 파트너를 직접 만난다. 이 과정에서 시각이 달라진다. 국내 시장에 안주하던 창업가들이 글로벌을 바라보기 시작한다. 더 크게, 더 도전적으로 사업을 구상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투자자가 아무리 강조해도 쉽게 바뀌지 않는 부분인데, 현지 경험이 자연스럽게 해결해 준다.
텍스코어는 지금 전국 17개 시도로 확대되고 있고, 과학기술 사병 제도와의 연계도 추진 중이다. 더 흥미로운 것은 이미 형성되기 시작한 동문 네트워크다. 앞선 2000여 명의 경험은 살아있는 자산이다. 성공한 선배가 후배를 멘토링하고, 실패를 경험한 이들이 다음 세대의 시행착오를 줄여주는 생태계가 만들어지고 있다. 텍스코어 출신 중에는 나중에 직원을 채용할 때 같은 프로그램 경험자를 선호하는 경우도 생겨나고 있다. 시장을 이해하고 고객에게 접근하는 방법을 경험으로 아는 인재의 가치를 아는 것이다.
이런 공공연구성과 확산의 중요성은 지난달 열린 ‘공공연구성과 확산 대전’에서도 다시 한번 확인됐다. 지난해 12월 10일 노벨상 수여일에 맞춰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도전으로 기술주도 성장을’이라는 슬로건 아래 연구자와 기업, 예비창업자, 기술중개자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기술 매칭부터 스케일업, 창업과 기술이전까지 공공연구성과 확산의 전 과정을 공유하는 장이었다. 올해에도 텍스코어와 같은 프로그램들이 만들어낸 성과와 경험아 확산되어 연구실과 시장이 한층 더 가까워지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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