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싱턴 외교가에서 마코 루비오 국무장관이 베네수엘라 총독 역할을 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총독은 왕이 아니지만 왕을 대신해 통치한다. 주권을 위임받은 통치자가 아니라, 주권을 박탈당한 땅 위에 내려앉은 대리 권력이다. 그래서 총독은 지배의 ‘노골적 얼굴’이다. 지금 베네수엘라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일들은 ‘총독’이 21세기에도 여전히 제국의 선택지로 남아 있음을 보여준다.

◆빌라도, 역사상 가장 유명한 총독

고대 로마 제국은 광대한 영토를 직접 통치할 수 없었다. 그래서 속주마다 총독을 파견했다. 총독은 로마의 이익을 현지에 관철시키는 존재였다. 총독이 공정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충성이었다.

역사상 가장 유명한 총독은 본디오 빌라도일 것이다. 그는 신약성서 4복음서(마태·마가·누가·요한) 모두에 등장한다. 사도신경에도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라는 문장이 나온다.

그는 로마 제국의 티베리우스 황제 시절 사마리아·유대·이도메아 지역을 통치하던 총독이었다. 그는 예수의 재판과 처형을 주관하면서 자신의 이름을 인류사에 각인시켰다. 그래서 오늘날에도 ‘총독 정치’를 말할 때, 빌라도는 언제나 가장 먼저 호출된다.

근대 들어 제국주의 열강의 식민지 쟁탈전이 격화되면서 총독은 더욱 제도화됐다. 열강들은 식민지에 총독을 두고 통치했다. 대표적인 인물이 영국령 인도 총독 조지 커즌이다. 그는 식민지 인도의 행정·교육·군사 분야의 개혁을 추진했지만 그 개혁은 결국 영국을 위한 것이었다. 그는 계몽의 얼굴을 쓰고 지배를 제도화했다. 이는 근대 제국주의 총독 정치의 전형이 됐다.

◆조선을 통치한 이름들

일본의 지배를 받았던 한국 역시 ‘총독’은 설명이 필요없는 단어일 것이다.

1910년 한일병합 직후 조선총독부가 설치됐다. 총독부 수장인 총독은 입법·사법·행정은 물론 군 통수권까지 장악했다. 총독은 절대 권력자로, 일왕을 대신해 조선을 통치했다.

초대 총독은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다. 그는 무단통치의 설계자였다. 헌병경찰, 태형제 등을 도입했다. 그는 귀국한 후 일본 총리를 지냈다.

2대 총독은 하세가와 요시미치(長曲川好道)다. 3·1 독립운동을 헌병과 경찰을 앞세워 무력 진압했다. 그는 일제 무단통치의 잔혹성을 깊이 각인시켰다

3대 총독은 사이토 마코토(齋藤実)다. 그는 ‘문화 정치’를 표방했다. 그는 부임하자마자 서울역에서 강우규 의사의 폭탄 공격을 받았다. 강우규 의사는 친일 경찰 김태석에 의해 체포되어 순국했다. ‘고문왕’으로 불렸던 김태석은 해방 후 반민특위에서 사형을 구형받았으나 반민특위가 해체되면서 석방됐다. 사이토는 3대와 5대 두 번 조선 총독을 지냈다. 총 10년 동안 조선을 통치했다. 일본으로 돌아간 후 총리를 지냈다. 1936년 육군 황도파(皇道派) 청년 장교들이 일으킨 2·26 쿠데타 때 도쿄의 자택에서 살해됐다.

8대 총독 미나미 지로(南次郞)는 내선일체(內鮮一體) 정책을 펼쳤다. 그는 조선인에게 창씨개명(創氏改名)을 강요했다. 동화라는 명분 아래 개인의 존재와 기억까지 지우려 한 식민 지배의 극단이었다.

마지막 총독은 아베 노부유키(阿部信行)다. 그의 퇴장은 일제 식민지 총독 정치의 종언이었다. 그는 A급 전범으로 극동국제군사재판에 회부됐으나 재판 시작 직후 피고에서 제외됐다. A급 전범의 요건인 ‘침략전쟁 기획·결정의 지도자’가 아니라는 이유였다.

조선 총독 자리는 모두 군인 출신들이 독식했다. 8명의 총독 가운데 해군 대장·해군 대신을 지낸 사이토를 빼고는 모두 육군 출신이었다. 대신 해군 출신은 대만 총독 자리를 거의 독식했다. 조선 총독은 육군이 지배한 대륙 식민지의 권력이었고, 대만 총독은 해군이 장악한 해양 식민지의 권력이었다.

◆약자의 땅에 나타나는 강자의 정치

루비오 국무장관은 쿠바계 미국인으로서 중남미 좌파 정권에 강한 적대감을 가져온 정치인이다. 국무장관이 되면서 베네수엘라 제재부터 야권 지원, 과도체제 구상까지 정책 전반에 깊숙이 관여해 왔다. 그는 니콜라스 마두로 베네수엘라 대통령 축출 과정에서 핵심 역할을 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베네수엘라를 권력 이양기 동안 미국이 직접 관리하겠다는 구상을 밝히면서 루비오 국무장관이 주목을 받고 있다. 외교가에선 그가 베네수엘라 총독 역할을 할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워싱턴포스트(WP)는 루비오 국무장관이 이미 여러 핵심 직책을 겸직하는 가운데, ‘베네수엘라 총독’이라는 직함을 하나 더 받게될 것이라고 보도했다. 만약 그가 외교적 조정자를 넘어 베네수엘라의 정치 일정과 권력 구조를 좌우하는 위치에 선다면 이는 사실상 총독이다.

루비오 국무장관이 정말로 총독이 될지는 아직 알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총독’이라는 단어가 다시 현실 정치로 소환됐다는 사실 자체가, 국제질서가 얼마나 거칠고 노골적인 방향으로 되돌아가고 있는지를 보여준다는 점이다. 총독은 언제나 약자의 땅에서 가장 먼저 모습을 드러낸다. ‘힘의 시대’가 돌아왔다는 신호다.

박영서 논설위원(pys@d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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