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전광판 앞은 전쟁터입니다."
최근 한 시중은행 딜러가 던진 짧은 농담 속에는 4대 은행(KB국민·신한·하나·우리) 딜링룸의 분위기 변화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코스피 훈풍이 불어오자 그동안 상대적으로 조용하던 은행권 트레이딩룸이 활기를 찾기 시작했다. 그동안 하나은행의 독점처럼 보였던 곳에 이제는 다른 은행들까지 가세하며 '전광판 전쟁' 시즌2가 개막됐다.
◇"우리도 한다"… '조용한 시절' 끝낸 은행들
14일 금융권에 따르면 일반적으로 은행 딜링룸은 증권사 트레이딩룸보다 조용한 편이었다. 시장 변동성이 크지 않으면 대형 전광판은 그저 숫자만 바뀌는 전시물에 가깝다는 평가도 있었다.
특히 하나은행은 자산운용·딜링부문에서 선도적 이미지가 있어 업계에서 "전광판이 가장 밝게 빛나는 곳"이라는 이야기도 돌았다. 하나은행 외에는 한국거래소 딜링룸이 미디어에서 많이 활용됐다. 공간이 넓은데다 증시 흐름을 상징적으로 담아낼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하지만 최근 분위기가 달라졌다. 연초부터 국내외 증시가 살아나고 금리 인하 기대감까지 겹치면서 트레이딩 관련 수익성 개선이 기대되자, 다른 은행들도 딜링룸 체질 개선에 속도를 내고 있다. 그동안 조용하던 자리에는 트레이더들의 목소리가 다시 커지고 있다. 은행마다 주요 자산군을 맡는 인력까지 확충하기도 했다.
시중은행 관계자는 "예전엔 하나은행이 메인 스테이지였다면 이제는 4대 은행 모두가 트레이딩 시장에서 자기 목소리를 낼 준비가 돼 있다"며 "특히 시장 변동성이 커지는 구간에서 은행들도 적극적으로 대응하기 시작했다"고 전했다.
◇커지는 '전광판 경쟁'… 딜러들 표정도 달라졌다
은행 딜링룸의 가장 상징적인 풍경은 벽면을 가득 채운 전광판이다. 이 숫자판이 환율·금리·선물·외환시장 가격을 실시간으로 쏟아내는데, 그동안 하나은행이 가장 공격적이고 빠른 대응력을 보여왔다.
오리지널 강자인 하나은행의 전광판은 가장 화려하고 화면 구성도 촘촘하다는 평을 받고 있다. 외환·금리·파생까지 한 화면에서 즉시 판단 가능한 '올인원 UI'를 활용, 하나은행 딜러들 특유의 적극적·공세적 매매 스타일이 고스란히 전광판에 반영됐다. 전광판 전쟁이란 말 자체가 하나은행에서 시작됐다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다.
하지만 최근에는 KB·신한·우리은행 전광판도 훨씬 밝아졌다.
국민은행의 전광판은 안정형·기동성을 강화했다. 기존에는 가장 보수적인 딜링룸 분위기였지만 올해 들어 시스템 개선 속도가 가장 빨라졌다. 전광판은 '노란색 라인'을 강조한 정돈된 화면으로 구성돼 있다. 최근 트레이딩 인력 재배치 후 종목·자산군별 화면 분리도 정교해졌다는 평이다. 딜러들 사이에서는 "KB 전광판이 예전엔 교과서였다면 요즘은 실전 병기"라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
신한은행 딜링룸은 가장 세련됐다는 반응이다. 신한은 화면 자체가 글로벌 뉴스룸을 연상시킬 정도로 깔끔한 스타일이다. 해외 지점과 리서치 정보가 잘 통합돼 있어 전광판의 레이어가 가장 풍부하다. 단순 숫자가 아니라 지표·속보·금리곡선까지 바로 뜨는 '데이터 허브형 전광판'이다. 전광판의 정보량·정교함만 놓고 보면 기술력 1위 후보라는 이야기까지 나온다.
우리은행 전광판 구성은 가장 '딜러 친화적'이라는 평을 받고 있다. 실속파 다크호스로 부상하면서 최근 업데이트 이후 속도감이 크게 향상됐다. 특히 우리은행은 딜링룸 화면에 가상자산 시세도 반영해 눈길을 끌었다. 우리은행은 딜링룸뿐만 아니라 서울 중구 우리금융그룹 로비에도 대형 미디어월을 설치했다. 실제 매매 기능을 수행하는 딜링룸은 아니지만 화면 구성과 정보 배열이 트레이딩 환경을 연상시켜 방문객이 자연스럽게 금융시장 흐름을 인식하도록 만들었다는 평을 받고 있다. 제2의 딜링룸 및 정보성 게시판처럼 활용돼 방문객들에게도 반응이 뜨겁다.
한 딜러는 "전에는 하나은행만 게임 모드였다면 지금은 모두가 배틀로얄에 들어온 느낌이다"고 현재 분위기를 전했다.
◇왜 지금 다시 뜨거워졌나?… 증시 '온기' 덕분
딜링룸이 다시 활기를 찾은 건 증시 회복세와 풍부해지는 유동성이 배경이다. 금리 인하 전환 기대감이 높아지면서 글로벌 투자심리가 살아났고, 외국인 수급도 국내 증시에 긍정적으로 들어오고 있다.
증권사들은 올해 코스피 상단 전망치를 올려잡는 분위기다. 특히 SK증권은 올해 코스피 상단 전망치를 대폭 상향 조정했다. SK증권은 올해 코스피 밴드 상단을 기존 4800에서 5250으로 9.4% 상향한다고 밝혔다. 최근 코스피가 신고점을 경신하는 흐름 속에서, 추가 상승 동력은 실적보다 밸류에이션 재평가(리레이팅)에서 나올 가능성이 크다는 판단이다.
국내외 증권사들은 반도체 투톱인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목표주가를 잇달아 올려잡고 있다. 글로벌 투자은행(IB) 맥쿼리는 삼성전자 목표주가를 24만원으로, SK하이닉스는 112만원으로 상향 조정했다. 씨티그룹과 KB증권도 삼성전자 목표주가를 20만원으로 올렸다.
은행들도 단순 예대금리 장사로는 수익 개선이 한계에 부딪히자, 트레이딩·자산운용 부문 강화로 시선을 돌리는 모습이다. 규제 여건도 조금씩 완화되고 있어 은행들이 내부적으로 '딜링룸 강화는 새로운 성장 동력'이라는 판단을 내린 것도 한몫했다.
덕분에 은행들에 젊은 딜러들의 비중도 확대되고 있다. 스크린 앞에서 감각적으로 시장을 읽는 MZ 딜러들이 늘면서, 딜링룸 특유의 보수적 문화도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다.
이들은 글로벌 지표 발표 시간마다 동료들과 빠르게 정보를 공유하고, 시장 급등락 때는 SNS 기반 실시간 흐름까지 점검하는 등 새로운 방식의 트레이딩 문화를 만들어가고 있다. 그만큼 딜링룸의 정보 흐름은 빨라지고 전광판도 훨씬 더 역동적으로 움직인다는 것이다.
◇전광판 전쟁, 앞으로 더 뜨거워진다
은행들은 이제 단순히 '하나은행 따라가기'를 넘어 각각의 전략 자산군을 강화하면서 수익 포트폴리오 경쟁을 본격화하는 분위기다.
업계에서는 전광판 전쟁이 단순 딜링룸 활성화에 그치지 않고, 은행 실적 전반에 변화를 불러올 수 있다고 내다봤다. 특히 운용 성과가 뚜렷하게 개선되는 은행과 그렇지 못한 은행 간 실적 격차가 벌어질 가능성이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한 트레이딩 업계 관계자는 "올해는 은행 딜링룸이 단순 보조 수익 창출 조직이 아니라 실적을 좌우하는 핵심 사업부로 부상할 것"이라며 "전광판을 얼마나 효율적으로 활용하느냐가 은행 전략의 승패를 가를 수 있다"고 말했다.
노출 효과가 부각되면서 4대 은행 모두 경쟁적으로 딜링룸을 홍보하고 있다. 장 마감 이후 딜링룸 사진을 별도로 촬영해 보도자료, SNS, 홍보 채널 등에 적극 활용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증시와 환율에 대한 관심이 커질수록 딜링룸 이미지의 기사 노출 가능성도 높아진다는 분석이다. 경제기사에 많이 활용되면 딜링룸의 상징성과 노출 효과는 더 커질 수밖에 없다.
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딜링룸은 은행 수익구조를 다변화할 수 있는 핵심 조직"이라며 "증시 흐름이 지금처럼 이어진다면 전광판 전쟁은 더 치열해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주형연 기자 jhy@d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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