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화균 편집국장
요즘은 생존을 걱정하지만 석유화학산업도 한때 좋은 시절이 있었다. 필자가 호황기 시절 석화 기업 임원으로 '외도'를 할 때의 경험담이다.
충남 서산 대산석유화학 단지. 한화토탈에너지스를 비롯, 롯데케미칼, LG화학, 현대오일뱅크 등 국가대표급 석화업체가 몰려 있는 곳이다.
당시 인구 2만명도 채 안되는 대산면에는 시민단체만도 10여개가 있었다. 작은 시설물 하나 설치하려해도 이들 단체들을 찾아가 협조를 구하고, 사안에 따라 동의까지 받아야 했다. 이 절차를 거치지 않으면 결격사유가 없어도 지방자치단체가 허가를 내주지 않았다. 인근 가게나 식당의 영업도 사실상 책임을 져야 했다. 당시 회사 담당자는 "장사가 안된다고 하면 매출을 올려주기 위해 가게로부터 장갑을 납품 받거나, 식당에서 사실상 강제 회식도 해야 했다"고 털어놨다.
이 정도는 애교다. 지자체나 정치인들의 요구는 사이즈가 훨씬 컸다. 막대한 세수는 기본이다. 주민을 위한 시설을 짓는다면서 출연금으로 수백억원을 요구했다. 그리고 적자가 뻔하니 운영까지도 직접 해달란다. 평소 첨예하게 맞서던 정치권도 이같은 이슈에는 한목소리를 내며 압박했다.
다른 지역에 사업장을 운영하는 석화기업 A사. 이 회사는 1000억원을 들여 지역에 문화시설을 지었다가 코를 꿰었다. 20년간 운영 후 지자체에 넘기는 조건이었다. 20년이 지나도 지자체는 기부채납을 거부했다. 직접 운영할 경우 대규모 적자가 불가피했기 때문이다. 결국 A사는 여전히 이 문화시설에 운영비 명목으로 매년 상당액을 지원하고 있다. 어려운 업황에 눈물의 구조조정을 하면서도, 문화시설 운영비는 꼬박꼬박 세금처럼 내고 있다.
기업의 지역상생은 의무다. 하지만 상식과 합리성을 토대로 해야 한다. '선'은 넘지 말아야 한다. 한 재계 인사는 "기업이 잘나간다하면 (지자체나 정치권 등이) 빨대를 꽂으려 달려든다"면서 "이들에게 기업은 '꿀 화수분'이다"고 하소연했다. 업체가 곤란해질까, 사례를 더 열거하지 않겠지만 이런 식의 요구는 비일비재다. 지자체장이나 정치인에게는 '업적'이다.
6·3 지방선거를 앞두고 삼성전자가 추진 중인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 이전 논란이 격화하고 있다. 작년 말 김성환 기후에너지환경부 장관이 "(반도체 공장이) 용인에 꼭 있어야 하느냐. 전기가 많은 쪽으로 옮겨야 하는 것 아닌 지 고민"이라고 했을 때는 그냥 '개인 의견'으로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호남권은 물론, 충북에 경북 정치인까지 뛰어들며 판을 키웠다. 심지어 전북도지사 출마를 준비 중인 한 국회의원은 이를 내란에다 갖다 붙였다. 용인 반도체 삼성전자 사업을 전북으로 이전하는 것이 내란을 끝내는 길이라고 했다. 수도권 정치인은 '원안 추진'을 외치고 있다. 여야를 떠나 지역을 중심으로 똘똘 뭉쳤다. 정당을 넘어 수도권 대 비수도권간 이슈가 됐다. 막대한 세수, 그리고 고용 창출이라는 '꿀단지'를 두고 너나할 것 없이 빨대를 들고 나선 것이다.
청와대는 지난 8일 "기업이 판단할 몫"이라고 선을 그었다. 교통정리를 기대했지만 오히려 갈등을 키웠다. 지역 정치권에서는 급기야 단체 행동에 나선다는 소식까지 전해진다. 서울 서초동 삼성전자 사옥 앞에서 기자회견을 하거나 집회를 연다는 것이다. 투자 주체인 삼성으로서는 답답할 노릇이다. '기업이 알아서 할 일'이라지만, 곧이 곧대로 했다가 닥칠 후폭풍이 두렵기 때문이다. 이미 경험칙으로 어떤 대가가 뒤따를 지 잘 알고 있을 터다. 정치권은 '기업이 알아서 잔치상을 차렸다'고 한다. 하지만, 기업에게 잔치상에 오를 음식 종류와 수량까지 은밀하게 하명하는 게 '갑'인 정치와 '을'인 기업간의 관계다. 삼성은 입을 꾹 다문 채 가슴앓이만 하고 있다.
한국 경제는 경기침체의 늪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반도체라는 단발 엔진(다행히도 터보 엔진)을 단 구명보트 하나에 의지해 태평양을 헤쳐나가는 형국이다. 이를 빼면, 수출 성적표도 초라하다. 노후대책인 국민연금의 주가수익률도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견인하고 있다. 이 엔진이 지방선거를 앞두고 지역 이기주의란 그물에 걸려 고장날 위기에 처했다. 그 후폭풍을 누가 책임질 것인가. 정치 외풍으로부터 'K-반도체'를 지킬 범국민 운동이라도 펼쳐야 할 상황이다.
김화균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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