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서 논설위원
도널드 트럼프의 재등장이 지구촌을 뒤흔든 한 해였다. 지난해 1월 취임 이후 그는 세계를 상대로 실험을 시작했다. ‘미국 우선’을 넘어 ‘미국만 우선’이라 할 수 있는 그의 세계관은 자유무역·다자주의·동맹이라는 전후 국제질서의 기본 문법을 정면으로 부정했다.
취임 직후 트럼프는 파리기후협약과 세계보건기구(WHO)에서 탈퇴했고, 불법 이민자들의 대규모 추방에 착수하는 등 전임 행정부와의 단절에 나섰다. 이는 국제 협력보다 국내 지지층 결집을 우선시하는 트럼프식 국정 운영의 방향을 분명히 드러냈다.
특히 각 나라들을 당혹과 충격에 빠뜨린 것은 4월에 발표한 ‘상호 관세’였다. 그는 ‘상호 관세’라는 이름의 전면적 보호무역 정책을 들고 나오며 동맹과 경쟁국을 가리지 않고 압박했다. 자유무역 질서를 전제로 움직여온 국제 통상 체계는 이 조치로 근본적 흔들림을 겪고 있다. 한국이 대규모 대미 투자를 조건으로 관세율을 낮춘 사례는 트럼프식 협상의 본질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 같은 트럼프의 일방주의는 종전(終戰)외교에서도 여실히 확인됐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트럼프의 호언장담과 달리 새해에도 이어지고 있다. 그의 종전 중재는 ‘속도’에 집착한 나머지 내용이 빈약했다. 우크라이나에게 영토 양보를 요구하면서도 실질적 안보 보장은 흐릿했고, 침략자인 러시아에 유리하다는 비판을 불렀다. 조기 성과를 앞세운 그의 외교는 미래의 재침공 위험을 외면한 채 부담을 유럽과 우크라이나에 전가할 태세다.
가자전쟁에서 드러난 트럼프의 행태는 냉혹한 계산과 도덕적 무감각을 함께 보여주고 있다. 이스라엘의 무차별 군사 행동에는 사실상 면죄부를 줬고, 막대한 민간인 희생 등 인도주의 위기에 대해선 일관되고 책임있는 해법을 내놓지 못했다. 더 심각한 문제는 전쟁의 폐허 위에 ‘가자지구 휴양지’ 구상이 떠돌고 있다는 점이다. 일가와 측근들의 부동산 개발·투기 의혹이 거론되면서 전쟁의 비극이 ‘이익의 대상’으로 읽히는 위험한 신호가 포착된다.
그린란드 문제 역시 같은 맥락이다. 안보와 자원을 명분으로 그린란드라는 땅을 협상 대상으로 삼은 그의 행태는 국가 주권을 불가침의 가치가 아니라 거래 수단으로 바라보는 인식을 적나라하게 보여줬다.
이러는 사이 중국·러시아·북한의 연대는 보란듯이 강화됐다. 북한의 우크라이나 파병으로 북·러 관계는 질적으로 전환됐다. 9월 베이징에서 열린 ‘중국인민 항일전쟁 및 세계 반파시스트 전쟁 승리 80주년’ 열병식에선 북·중·러 정상이 함께 모습을 드러내 미국에 맞선 세 나라의 결속을 상징적으로 과시했다.
그렇다면 올해 세계는 어떤 모습의 트럼프를 다시 마주하게 될까. 새해 벽두 단행된 베네수엘라 공습과 니콜라스 마두로 압송은 트럼프의 행태가 올해 더 거칠고 노골적인 방향으로 전개될 가능성을 예고하는 장면이다.
현재 트럼프는 국내적으로 복합적 압박에 직면해 있다. 상호 관세의 위법성을 다투는 연방대법원 판결이 예정돼 있고, 연방 하원 전체와 상원의 3분의 1을 새로 뽑는 중간선거도 치러야 한다. 관세 정책 여파로 물가 불안이 이어지는 가운데, 지지율이 30%대로 떨어졌다는 점은 트럼프에게는 큰 부담이다. 만약 중간선거에서 패하면 조기 레임덕을 겪을 수 있다
이런 상황이라 트럼프는 외부로 시선을 돌리는 충돌적 행보에 더 의존할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이는 내부 갈등을 키우는 역설을 안고 있다. 시간이 흐를수록 미국 사회의 균열은 더 커질 것이다.
트럼프가 흔든 지난 1년은 국제 질서가 얼마나 빠르게 불안정해질 수 있는지를 보여줬다. 올해도 세계는 순탄치 않을 것이다. 그러나 위기는 동시에 기회가 된다.
한국은 더 이상 관성에 기대거나 눈치로 버틸 수 없다. 성급한 양보도, 감정적 대응도 답이 아니다. 속도를 조절하며 버티고, 연대를 통해 압박을 분산시키며, 국익 앞에서는 당당해야 한다. 주권과 실리를 분명히 하되 전략적으로 움직일 때 불확실성은 관리 가능한 위험이 된다.
‘트럼프 시대’가 던진 질문은 하나다. 한국은 스스로의 힘과 판단으로 트럼프를 상대할 준비가 돼 있는가. 국익을 기준으로 한 자주적 전략이 시험대에 올랐다.
박영서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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