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재 발생 거주 아파트 복도엔 2m 높이 쓰레기 산
악취 시달려도 지자체 강제개입 근거 없어
노후 공동주택에 스프링클러 미설치, 참변 요인
지난 28일 울산의 한 아파트에서 발생한 화재로 숨진 70대 주민이 베트남전 참전 국가유공자라는 사실이 뒤늦게 확인됐다.
20년 가까이 홀로 지내온 이 남성은 집안에 쓰레기를 쌓아두는 ‘저장 강박’ 증세를 보였던 것으로 전해졌다. 그는 화재 현장에서도 높게 쌓인 쓰레기 더미 위에서 심정지 상태로 발견됐다.
화재 발생 하루 뒤인 29일 울산 남구의 한 아파트 화재 현장에는 전날 화재 진압 과정에서 사용된 소화용수가 복도와 엘리베이터 앞까지 고인 상태로 남아 있었다.
복도 끝에는 음식물 쓰레기에 옷가지, 가전제품 등이 사람 키보다 높게 쌓여 있어 폐기물 처리장, 또는 고물상을 방불케 했다. 불이 난 세대의 집안 가득 채우고 있던 쓰레기 더미를 화재 진압 과정에서 집 밖으로 끄집이 내면서 만들어진 쓰레기산이었다.
소방 당국에 따르면 화재 진압을 위해 해당 세대의 현관문을 열자, 쓰레기가 집 안에 성인 남성 키 높이까지 쌓여 있어 사실상 생활 거주공간으로서의 기능을 찾아볼 수 없는 상태였던 것으로 전해졌다.
이 곳에 살고 있던 70대 남성 A씨는 높이 쌓인 쓰레기 더미 위에서 심정지 상태로 발견됐고,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끝내 숨졌다. 오랜 기간 집안에 쓰레기를 쌓아두는 생활을 이어오던 그가 불 난 집에서 미처 벗어나지 못하고 생을 마감한 것이다.
월남전 참전 유공자였던 그는 이 아파트에서 20년 가까이 홀로 지내왔다고 한다. 참전명예수당으로 매달 정부로부터 월 45만원을 받아왔다.
이웃 주민들에 따르면 A씨는 수년 전부터 집 안에 폐가전, 옷가지 뿐만 아니라 쓰레기를 쌓아두고 지내는 저장강박 증세를 보였다. 외출했다가 돌아올 때면 비닐봉지에 갖가지 쓰레기를 담아 들고 오는 모습이 목격되곤 했다. 한 주민은 “우리 눈에는 쓰레기지만 본인은 중요한 물건이라고 여긴 것 같다”고 말했다.
아파트 관리사무소 직원은 “몇 년 전 아파트 경비를 들여 쓰레기를 모두 치우고 도배와 장판까지 새로 해준 적이 있었다”며 “하지만 이후 다시 쓰레기가 쌓였고, 정리를 요구하자 ‘법대로 하라’는 반응을 보였다”고 말했다.
정리를 권유했던 구청과 동 행정복지센터도 당사자의 강한 거부 의사 때문에 손을 쓸 수 없었다고 한다. 이번 화재를 계기로 저장강박 의심 가구에 대한 관리 공백이 드러난 셈이다.
A씨가 쓰레기 집을 만들어가는 동안 이웃들은 악취와 해충 등 고통에 시달려야 했다. 하지만, 현행 제도로는 지자체가 강제로 개입할 근거가 부족했다. 일부 지자체에는 저장강박 의심 가구를 지원·관리하는 조례가 마련돼 있지만, 이번 화재가 난 남구에는 관련 제도적 근거가 없는 상태다.
이번 화재가 참변으로 이어진 원인 중 하나로 소방시설 부재도 꼽힌다. 불이 난 아파트에는 각층에 옥내 소화전이 1개씩 설치돼 있었다. 하지만, 화재를 감지해 자동으로 물을 뿌려주는 스프링클러 시설은 갖추지 못했다.
소방 당국에 따르면 해당 아파트는 스프링클러 설치 의무 대상이 아니다. 이 아파트는 총 10층 규모로, 현행 소방시설법하에서 준공됐다면 스프링클러 설치 대상이다. 그러나 1996년 사용승인 당시에는 16층 미만 공동주택에 설치 의무가 없었다.
이후 법 개정을 통해 스프링클러 설치 의무가 단계적으로 확대됐지만, 개정 이전에 만들어진 아파트까지 이런 의무를 소급 적용하지 않았다. 아, 노후 공동주택 상당수가 여전히 스프링클러 없이 방치돼 있는 실정이다.
소방청이 지난 6월 공개한 ‘전국 노후 아파트 현황’에 따르면, 준공 후 20년이 지난 전국 노후 아파트 9천894곳 중 4460곳(45.1%)에 스프링클러 설비가 설치돼 있지 않다.
박양수 기자(yspark@dt.co.kr)실시간 주요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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