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태훤 부국장 겸 부동산유통부장
“글로벌 기업의 최고경영자(CEO)로서 바쁜 공식 비즈니스 일정 때문에 부득이….”
이번엔 바쁘다는 핑계를 댔다. 딱 10년 전인 2015년, 협력업체 부당행위 의혹으로 국회 청문회 증인으로 채택됐을 땐 “농구를 하다가 아킬레스건이 파열돼 거동이 불편하고 긴 바지를 입을 수가 없다”는 이유를 들었다.
‘사람 고쳐 쓰는 것이 아니다’는 옛말이 있는데, 이분 역시 예외는 아닌 듯 한결 같다. 시간이 지나도 달라질 기미가 안보인다.
쿠팡이 대한민국 3370만명의 고객 정보와 일상이 털린 사고를 친 것이 드러난지도 시간이 꽤 지났다. 비난의 손가락이 모두 쿠팡의 최대 주주이자 실질적 지배자인 김범석 의장을 가리키고 있지만, 170여 나라에서 글로벌 경영을 하느라 바쁜지 비즈니스 일정은 챙겨도 책임져야 할 한국 시장과 소비자 앞에는 코빼기도 비칠 생각이 없어 보인다.
참다못한 국회가 청문회에 불러도, 대통령이 관련 정책 당국에 “징벌적 과징금과 집단소송제 도입을 주문하고 국민에게 피해를 주면 회사가 망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도록 제재해야 한다”고 질책을 해도 김 의장은 “바쁘다”며 불출석을 통보했다. 그런 사이 본인 대신 사태를 책임지라고 쿠팡 대표이사도 미국 본사의 법무 담당 미국인 CEO로 전격 교체했다.
기대하지도 않았지만 털끝만한 염치조차 찾아볼 수 없다. 이쯤 되면 피해 고객과 소비자는 물론, 국회도 대통령도 글로벌 기업의 경영인이라는 김 의장의 한결같은 뻔뻔함과 오만에 야무지게 짓밟힌 것 아닌가 싶다.
지금의 쿠팡 사태가 일파만파 커지고 국민적 공분을 키운 건 수천만명의 고객 정보 유출이 심각한 사태라는 데에도 있지만, 김 의장이 한국의 소비자를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대하는지 이유가 더 크다.
글로벌 빅테크를 자처하는 기업이라면 고객정보는 ‘자산’ 그 이상의 ‘책임’이다. 그 책임이 훼손됐을 때 경영 책임자가 우선에 둬야 할 일은 명확하다. 피해 고객에게 직접 사과하고, 원인을 설명하며, 재발 방지 약속을 공개적으로 밝히는 것이다. 이는 법 이전의 문제이자, 신뢰를 바탕으로 해야 할 플랫폼 기업의 최소한의 윤리다.
글로벌 CEO로서 해외 일정이 바쁘고, 책임은 실무 경영진이 진다는 설명은 한국 소비자에게 통할 명분이 아니다. 한국 소비자의 데이터, 한국 노동자의 손과 땀, 대한민국의 인프라 위에서 만들어진 오늘의 쿠팡 아닌가.
김 의장의 국적이나 직함, 미국 본사 법인의 소유 구조를 떠나 이런 상황에서 가장 먼저 고개를 숙이고 책임 있는 자세를 보여야 할 대상이 한국의 피해 고객이란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글로벌 CEO’라는 직함이 한국 소비자 앞에서 책임을 비껴가는 면죄부가 될 수는 없다.
김 의장의 침묵과 오만은 우연이 아니라고 본다. 쿠팡에 녹아내린 정부와 국회 탓도 크다. 쿠팡은 가장 조직적이고 적극적으로 대관 활동을 펼쳐온 기업 중 하나로 꼽힌다. 숱한 로비를 통해 국회와 정부에 전달한 메시지는 일관됐다. ‘쿠팡 규제는 일자리 위협’, ‘플랫폼 규제는 소비자 불편’이라는 프레임으로 ‘여의도’와 ‘세종시’, 양지와 음지의 공무원들까지 그의 뜻대로 주물렀다. 민주당 고위 인사까지 그와 자리를 함께 했다.
이 논리는 여러 차례 효과를 발휘했다. 플랫폼 규제 논의가 나올 때마다 국회와 정부는 기업의 ‘혁신’과 ‘성장’ 논리에 흔들려 왔다. 국회는 ‘추가 검토’를 반복했고, 정부는 ‘시장 자율’을 앞세웠다. 그 사이 쿠팡은 유통 공룡이 됐지만 상응하는 책임 구조는 만들어지지 않았다. 김 의장의 직접 책임을 요구하는 제도는 논의조차 되지 않았다.
우리 앞에 남은 건 ‘사과하지 않아도 잊힌다’, ‘최고책임자는 비켜나도 된다’는 왜곡된 메시지뿐이다. 바쁘다는 김 의장 청문회 불출석 통보에 여당이 쿠팡 국정조사와 김 의장 고발에 나서기로 했지만 그가 귓등으로라도 듣겠나 싶다. 소비자도 두려워하지 않는 김 의장의 배짱 좋은 글로벌 CEO의 자질에 격한 박수를 보낸다.
전태훤 부국장 겸 부동산유통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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