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해자 보호 명분에 속도 붙은 입법… 은행, 비용·형평성 우려
전면 도입보단 단계적 시행 관측… 책임 범위 조율이 관건
정부가 연내 보이스피싱 피해액의 일부 또는 전부를 금융사가 배상하도록 하는 '무과실 배상 책임제' 법제화를 추진하면서 은행권의 긴장감이 커지고 있다. 피해자 보호 강화를 명분으로 제도 도입에 속도가 붙고 있지만, 은행권은 책임 범위와 비용 부담을 이유로 신중론을 유지하며 선제적 대응에 나서는 모습이다.
15일 금융권에 따르면 금융당국은 보이스피싱 범죄가 갈수록 조직화·지능화되면서 개인이 피해를 예방하기 어려워졌다는 점을 들어 금융사의 책임을 제도적으로 강화하려는 분위기다. 무과실 배상 책임제란 금융회사의 과실이 없어도 보이스피싱 피해액 일부 또는 전부를 피해자에게 배상하도록 하는 제도다.
당국은 은행의 사전 경고가 있었거나 피해자의 명확한 과실이 입증되는 경우 등에 대해선 배상 책임을 면하는 방향으로 검토 중이다. 기존에는 은행이 자율적으로 일부 피해를 보상하는 수준에 그쳤지만 이를 법으로 명문화해 피해자 보호의 실효성을 높이겠다는 것이다.
반면 은행권은 무과실 책임 원칙이 과도하게 적용될 경우 사실상 범죄 피해에 대한 책임을 과도하게 금융사가 떠안게 될 수 있다며 우려하고 있다. 보이스피싱은 통신망, 수사기관, 플랫폼 등을 복합적으로 악용하는 범죄임에도 최종 자금 이동 창구라는 이유만으로 은행에 배상 책임을 집중시키는 것은 형평성에 맞지 않는다는 주장이다.
특히 피해액 전부를 배상하도록 의무화할 경우 비용 부담이 급격히 늘어날 수 있다는 점도 부담이다.
은행권의 한 관계자는 "전액 배상이 제도화되면 은행이 사실상 보이스피싱 범죄의 보험자 역할을 하게 되는 셈"이라며 "장기적으로는 금융 서비스 비용 상승 등 부작용이 나타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은행권 내부에서는 도덕적 해이 가능성도 제기하고 있다. 배상이 법적으로 보장될 경우 일부 이용자가 위험 신호를 인지하고도 거래를 강행하거나 범죄에 악용될 소지가 커질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 현장에서는 피해 여부 판단이 모호한 사례도 적지 않아 책임 기준을 둘러싼 분쟁이 빈번해질 가능성도 거론된다. 이에 은행권은 제도 도입 자체보다는 배상 범위와 조건을 명확히 하는 보완 장치가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다만 정부 정책 기조를 고려해 은행들은 선제적으로 대응에 나서고 있다. 주요 은행들은 인공지능(AI) 기반 이상 거래 탐지 시스템을 고도화하고, 고액 이체 시 추가 인증 절차를 강화하는 등 예방 중심의 보안 투자를 확대하고 있다. 일부 은행은 법제화 이전부터 자율적인 피해 보상 프로그램을 운영하며 소비자 보호에 나서고 있다.
시장에서는 무과실 배상 책임제가 현행안 그대로 전면 도입되기보다, 은행권과의 조율을 거쳐 단계적·제한적 형태로 시행될 가능성이 크다는 관측이 우세하다. 배상 비율 상한 설정, 은행의 관리·감독상 과실이 확인된 경우로 책임을 한정하는 방식 등이 절충안으로 거론된다.
금융권 관계자는 "은행들도 피해자 보호라는 정책 취지에 공감하지만 제도가 지속 가능하려면 책임 범위와 기준이 명확해야 한다"며 "예방 강화와 책임 분담을 병행하는 방향으로 제도가 설계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주형연 기자 jhy@d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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