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원갑 KB국민은행 부동산 수석전문위원

집의 역사는 곧 여성의 역사다. 그리고 그 핵심에는 언제나 ‘부엌’이 있었다. 과거 부엌은 집 안에서도 가장 낮고 어두운 공간이었다. 시골 한옥의 부엌 바닥은 마당보다 낮았다. 취사와 난방을 위해 아궁이에 불을 때기 위한 구조였기 때문이다. 이러다보니 큰 비가 오면 마당의 물이 고스란히 부엌으로 흘러들어오곤 했다. 부엌은 음식 저장을 겸하는 공간으로 활용되었기에 햇볕이 들지 않는 서북향에 배치됐다. 이런 공간은 사회적으로 낮은 지위에 놓였던 여성의 삶을 상징했다.

박제가의 ‘북학의’에서도 ‘비만 오면 부엌으로 물이 흘러든다’는 대목이 등장하는데, 이는 조선의 비위생적 생활환경을 꼬집으면서 동시에 당시 부엌이 처한 현실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이처럼 부엌은 오랫동안 분리되고 감춰진 공간이었다. 조리와 허드렛일을 담당하던 여성이나 하인이 머무는 집 안의 뒷쪽 공간이었다. 한 세기 전만 해도 부엌은 본채와 떨어져 있거나 벽으로 완전히 차단된 폐쇄적 장소에 가까웠다.

그러나 아파트가 등장하면서 부엌은 전혀 다른 의미를 갖기 시작했다. 아파트는 평평한 바닥과 개방형 구조를 통해 입식 생활을 도입했다. 그리고 거주 동선도 합리적이고 위생적으로 재구성됐다. 무엇보다 부엌은 더는 마당보다 낮은 지대의 어두운 방이 아니라 거실과 같은 높이에서 연결되는 열린 공간으로 편입됐다.

부엌이 아닌 주방이라는 명칭이 정착된 것 자체가 상징적이다. 조선 시대 왕의 음식을 만들던 소주방(燒廚房)에서 비롯된 이 말은, 요리 공간이 천한 노동의 장소에서 집의 중심 공간으로 격상됐음을 은연중에 드러낸다.

2000년대 이후 주방의 평면 배치는 또 한 번의 변화를 겪는다. 이전까지 후면부 중간에 있었던 주방은 2010년대 들어 점차 전면부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거실과의 연계성을 강화해 두 공간을 가족실로 통합하려는 시도였다. 이는 주방이 더 이상 특정인의 업무 공간이 아니라 가족 모두의 일상과 대화가 오가는 공유 공간이 되었음을 뜻한다.

요즘 소형 주택에서 부엌을 창가로 배치하는 경향도 같은 맥락이다. 냉장 기술이 발달하면서 북향에 둘 이유가 사라졌고, 요리를 노동이 아니라 취향으로 즐기는 문화가 확산하면서 밝고 쾌적한 주방이 요구되기 시작한 것이다.

일본 주택에서 볼 수 있는 ‘카운터 키친’은 이러한 변화를 상징하는 대표적 사례다. 부엌과 식사 공간 사이에 카운터(작업대)를 두어 조리하면서 가족이나 손님과 대화할 수 있도록 설계된 주방 스타일이다. 카운터 키친은 공간을 효율적으로 쓰면서도 소통을 가능하게 만든 현대 주거문화의 산물이다. 이런 흐름은 우리나라에서도 아일랜드 주방이라는 형태로 이어지며, 주방을 집의 변두리에서 생활의 중심으로 끌어 올린다.

영국 건축가 에드윈 헤스코트가 ‘집을 철학하다’에서 ‘부엌은 집의 조종실이며 취향의 대변인’이라고 말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요즘 집안에서 스테인리스 마감재와 최신 가전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곳 역시 주방이다.

이런 변화는 여성의 지위 변화와 무관하지 않다. 전통사회에서 부엌은 여성을 가두고 역할을 고정하는 공간이었지만, 산업화와 도시화, 주거 혁신을 거치며 부엌은 가족이 함께 사용하는 공용 공간으로 재탄생했다. 더 나아가 이제는 ‘앞으로 여성이 밥을 하지 않는 시대가 올 것’이라는 전망까지 나온다. 가치관이 달라지고 가사노동의 분담이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면서, 부엌은 자연스럽게 누군가의 몫이 아닌 가족 공동의 공간이 되어가고 있다.

주방이 거실 옆 명당으로 이동한 이유는 햇볕이 잘 들어서만이 아니다. 주방의 이동은 여성의 노동이 집 안의 중심으로 이동했음을 의미한다. 과거의 부엌이 ‘보이지 않는 노동’의 상징이었다면, 지금의 주방은 ‘생활이 드러나는 무대’다. 공간의 변화는 곧 역할의 변화이고, 역할의 변화는 결국 지위의 변화를 이끈다.

부엌의 역사는 여성의 해방이 공간적으로 구현된 과정이다. 그리고 그 변화는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주방이 창가 명당에 자리 잡는 이 시대, 우리가 마주한 부엌은 더 이상 식사 준비의 장소만이 아니라 가족의 민주주의가 일상적으로 작동하는 공간인지도 모른다. 그 민주주의는 아파트 문화 속에서 확산됐다. 여성들이 단독주택보다 아파트를 선호하는 이유 역시 이 변화와 맞닿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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