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지구의 ‘서반구’(남북 아메리카 대륙)는 내 구역이라고 주장하는 신(新)먼로주의 노선을 공식화했다.
또 대만의 일방적 지위 변경이나 대만해협 현상 변경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분명히 하고, 특정 국가의 남중국해 장악을 막겠다는 뜻을 명시했다.
앞선 정부가 발표한 NSS에서 북한의 비핵화 기조가 천명된 것과 달리 이번 NSS에서는 북한이 한 번도 등장하지 않은 점도 눈여겨볼 대목이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이름을 따 ‘돈로주의’라고도 불리는 신먼로주의는 1800년대 유럽 갈등에 대한 개입을 자제하고, 아메리카 대륙에서의 국익에 집중하는 고립주의를 표방했던 먼로주의의 ‘확장·개정판’으로 볼 수 있다.
백악관이 5일(현지시간) 공개한 트럼프 2기 행정부의 첫 ‘국가안보전략’(NSS)에는 인도·태평양, 유럽, 중동에서의 주도권을 유지하되 전략적 우선순위를 서반구에 두겠다는 방침이 드러나 있다.
아메리카 대륙에서 미국을 유일무이한 패권국으로 자리매김시키겠다는 이 전략은 “수년간 방치된 서반구에서의 우위를 회복”하겠다는 표현으로 집약된다.
미국은 먼저 “비(非)서반구 경쟁국들은 (미국에) 경제적 불이익을 주고 미래 전략적 피해를 초래할 수 있는 방식으로 ‘우리 반구’에 크게 침투해 왔다”면서 “이를 심각한 저지 없이 허용하는 전략적 실수를 저질렀다”는 반성을 전제했다.
‘비서반구 경쟁국’은 중국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된다. 중국이 ‘일대일로 프로젝트’를 통해 중동·아프리카를 넘어 중남미(라틴 아메리카) 곳곳에 세력을 확장했다는 의미다.
실제로 중국은 태평양과 대서양을 이으면서 북미와 남미를 가르는 파나마를 비롯해 천연자원의 보고인 베네수엘라, 미국의 ‘턱밑’인 쿠바 등 북중미 여러 나라에 차관·원조와 투자 등을 통해 영향력을 키워왔다.
“저비용 외국 원조에는 스파이 활동, 사이버 보안, 부채 함정 등 수많은 비용이 내재”돼 있는데, 중국이 바로 ‘저비용 원조’를 통해 중남미 국가들을 장악하고 미국을 위협하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게 미국의 판단이다.
미국은 그동안 일대일로 프로젝트를 강력 저지하지 못한 결과 중국과 이들 국가가 평화적·경제적 교류를 강화했을 뿐 아니라, 미국과 충돌할 경우 중국에 군사·경제·정보력 우위를 허용할 수 있게 됐다고 우려한다.
미국은 이 같은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정치·군사력은 물론 ‘소프트 파워’ 측면에서도 중남미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해 “적대적 외부 세력의 영향력을 축소”하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먼저 상대적으로 중요성이 떨어지는 지역에서 중남미 지역으로 군사력 배치를 재조정하는 동시에, 해상 통제와 국경 보안을 강화하겠다고 밝혔다.
지난 10월 제럴드 R. 포드 항공모함 전단 및 항공단을 미 남부사령부 관할 지역인 중남미와 카리브해, 파나마 운하, 대서양 일부 등에 배치한 게 대표적이다. B-1B 폭격기를 비롯한 전략 자산을 카리브해 상공에 띄우기도 했다.
또 ‘마약 테러리스트’ 처단과 ‘불법 이민’ 차단을 내세워 베네수엘라 선박을 공격하고 지상군 투입을 준비하고 있다. 국내에서 대대적 이민 단속을 벌이는 것도 ‘내부 침투자’를 솎아내려는 의도로 읽을 수 있다.
미국은 “우리의 원칙과 전략에 광범위하게 부합하는 지역 정부, 정당, 운동을 보상하고 장려할 것”이라면서 중남미의 반미·친중 정권에 대한 정치적 개입 의지도 공공연히 내비쳤다.
트럼프 대통령은 ‘옛 친구’(자이르 보우소나루 전 대통령)를 돕는다는 명분으로 브라질을 압박하고 있으며, 베네수엘라와 콜롬비아에 대한 정치적 공세도 강화하고 있다.
최근에는 온두라스 대선에서 우파 후보를 공개 지지하는 한편, ‘남미의 트럼프’로 불리는 하비에르 밀레이 대통령이 집권하자 아르헨티나를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있다.
이 같은 정치적 개입은 친중·반미 정권의 국가들을 배제·압박·회유하고 친미 정권을 중남미 곳곳에 세워 중국의 영향력을 차단하는 교두보로 삼겠다는 의도가 다분하다.
이와 함께 소프트 파워 측면에서도 “관세와 상호 무역을 강력한 도구”로 활용하는 한편, “금융 및 기술 분야에서 미국의 영향력”을 지렛대로 삼아 중국의 원조를 거부하도록 유도하겠다는 전략이다.
미국은 일련의 패권주의적 행보를 통해 중남미 국가들이 “미국이 주도하는 주권 국가와 자유 경제의 세계에서 살고 싶은지, 아니면 지구 반대편 국가들의 영향력 아래” 살고 싶은지 선택하도록 하겠다고도 밝혔다.
서반구에서 중국의 영향력을 축소하고 미국의 독보적 위상을 확립하겠다는 전략은 “군사 시설, 항만, 핵심 인프라 통제권”에 대한 중국의 접근을 차단하는 동시에 미국의 장악력을 강화해 국익을 극대화하려는 게 목적이다.
나아가 중국과의 무역 전쟁에서 희토류와 핵심 광물 분야 약점을 드러낸 미국은 중남미의 풍부한 자원을 확보함으로써 미중 패권 경쟁의 발판으로 삼겠다는 의도도 담겨 있는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이번 NSS에는 인도·태평양 지역에서 미국의 위협 요인인 북한에 대한 언급이 아예 없었고, 과거 NSS에 포함됐던 북한 비핵화(한반도 비핵화) 목표도 빠졌다.
결국 트럼프 행정부는 한일 두 나라에 대한 핵우산 제공 공약은 견지하되, 대북 방어에 대한 책임을 상당 부분 한국에 맡기고 미국은 중국 견제, 그중에서도 대만해협 사태 발생을 억제하는 데 집중하겠다는 의중을 이번 NSS에 내포한 것으로 읽힌다.
NSS는 대만의 반도체 생산과 함께 대만이 제2 도련선(島鏈線·열도선·일본 이즈반도∼괌∼사이판∼인도네시아)에 대한 직접적 접근을 제공하는 점과 동북아와 동남아를 2개의 전구(戰區)로 구분 짓는 지역에 위치하는 점 등을 대만 중시 기조의 배경으로 꼽았다.
또한 대만 유사시에 대비함에 있어 한국과 일본 등 제1도련선내 동맹국들의 역할을 요구할 것임을 분명히 했다. NSS가 “트럼프 대통령이 일본과 한국의 비용 분담 증가를 강력히 요구함에 따라, 우리는 이들 국가에 적국을 억제하고 제1도련선을 방어하는 데 필요한 역량에 초점을 맞춰 국방 지출을 늘릴 것을 촉구해야 한다”고 강조한 것이 그것이다.
이 같은 대만 중시 기조는 한국 안보에 ‘양날의 검’이 될 수 있다.
대만에 대한 관심 자체가 미군을 인도태평양 지역에 묶어두는 효과로 연결될 수 있다.
이번 NSS는 “서태평양에서 우리의 군사적 주둔을 강화할 것”이라며 한일 등 인도·태평양 지역 동맹국에서의 미군 주둔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이것으로 2만8500명 규모인 주한미군 감축 가능성이 배제되는 것은 아니지만 미군이 쉽게 한국, 일본, 필리핀 등 역내 동맹국에서 발을 빼지 않을 것임을 시사하는 측면이 있는 것이다.
또 중국 견제 목적에 방점이 찍혀 있음을 감안하더라도 미국이 한국의 군사력 강화를 독려하는 것은 전시작전통제권(전작권) 전환을 포함한 한국의 독자적 방위 역량 강화에 기여할 수 있는 측면도 간과할 수 없다.
그러나 미국이 중국의 대만 침공을 억제하는 데 있어 한국의 역할을 원한다는 점을 시사한 것은 한국에 ‘딜레마’로 작용하는 측면도 배제할 수 없어 보인다.
특히 트럼프 대통령이 한국의 핵추진 잠수함 건조를 지지하고 나선 상황에서 핵잠 등을 통해 대북 억지력을 강화하려는 한국과, 대중국 억지력 강화에 한국의 강화될 군사 역량을 활용하길 원하는 미국 사이에 ‘동상이몽’의 상황이 전개될 수 있어서다.
중국이 앞으로 한국 안에서 이뤄질 각종 군사력 강화 행보가 자신들을 견제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하기 위해 압박을 해올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어 보인다.
한국으로선 미중 전략경쟁이라는 ‘큰 판’의 흐름을 읽어내면서 한미동맹 강화를 통한 대북 억지력 강화와, 미국이 요구하는 한미동맹의 대중국 견제 역할, 한중관계 관리 등 3마리 토끼를 쫓아야 할 상황이다.
특히 미중이 무역 전선에서 최근 ‘휴전’을 택하고, 내년 최대 4차례의 정상회담을 검토하는 등 양국간 갈등과 경쟁 관계를 ‘숨고르기’하는 듯한 이때 한국으로선 대미·대중 정책을 포괄하는 안보 전략을 고민해야 할 것이라는 목소리가 제기될 것으로 보인다.
아울러 이번 NSS에 북한 비핵화 목표를 포함해 북한 관련 기술이 전면적으로 빠진 만큼 트럼프 행정부가 한반도 안보 상황에 대한 관심을 방기하지 않도록 하고, 북핵 문제 해결에 대한 집중력을 잃지 않도록 하는 데도 한국 정부의 대미 외교력이 집중돼야 할 것으로 보인다.
트럼프 행정부가 북한을 핵보유국으로 공식 인정하는 상황은 없을 것이라는 게 많은 관측통들의 예상이긴 하지만 북한의 핵무기 보유 ‘사실’을 인정하는 동시에 ‘북한 비핵화’가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인식을 하고 있는 것일 수 있는 만큼 대북정책 조율이 더욱 중요해질 전망이다.
이규화 대기자(david@dt.co.kr)실시간 주요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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