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자지구를 빠져나온 팔레스타인 주민 수백 명이 목적지도 모른 채 남아프리카공화국에 도착한 사건이 국제사회의 우려를 자아내고 있습니다. 출국 도장이 없는 여권, 실체가 불분명한 중개단체, 가상화폐로 지불된 ‘탈출 비용’은 이번 비행이 단순한 피난이 아님을 시사합니다. 팔레스타인 주민들의 반강제적 이주가 시작된 것 아니냐는 관측을 낳고 있습니다.
더시티즌 등 남아공 현지 매체에 따르면 전세기를 타고 이스라엘 라몬 공항에서 이륙한 팔레스타인인 153명은 케냐 나이로비를 거쳐 지난주 남아공 요하네스버그 OR탐보 국제공항에 도착했습니다. 여권에는 이스라엘 출국 도장이 찍혀 있지 않았습니다. 이에 남아공 당국은 시릴 라마포사 대통령이 이들의 90일간 체류를 허용하기 전까지 12시간 동안 이들을 비행기에 머물게 했습니다. 이후 이들 중 23명은 제3국으로 다시 출국했고 나머지 130명은 현지 자선단체 ‘기프트 오브 더 기버스’(Gift of the Givers)의 주선으로 숙소를 제공받아 남아공에 머물고 있습니다.
기프트 오브 더 기버스에 따르면 이에 앞선 지난달 28일에도 팔레스타인인 176명을 태운 비행기가 요하네스버그에 도착한 바 있습니다. ‘알마즈드(Al-Majd) 유럽’이라는 이름의 단체가 이들의 가자지구 출발에 관여했으며, 요하네스버그에 도착할 때까지 이들은 최종 목적지가 남아공인지 몰랐던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한 탑승객은 1인당 1600달러를 가상화폐 계좌에 입금하면 가족들을 가자지구에서 빼주겠다는 제안을 받고 남아공에 오게됐다고 말했습니다. 또 다른 2명은 1인당 2000달러를 냈다고 밝혔습니다.
이를 놓고 남아프리카공화국 외무장관은 “가자지구와 요르단강 서안에서 팔레스타인인을 청산하려는 명확한 의도가 감지된다”고 밝혔습니다. 로널드 라몰라 남아공 외무부 장관은 지난 17일 요하네스버그에서 연 기자회견에서 “비행기 도착을 둘러싼 정황을 의심하고 있다”며 이같이 말했습니다. 그는 “우리는 더 이상 비행기가 오기를 원하지 않는다”며 “이는 가자지구와 서안 등지에서 팔레스타인인을 청산하려는 의도로 남아공이 반대하는 바”라고 재차 강조했습니다. 그러면서 “팔레스타인 주민들을 세계 각지로 이주시키려는 의도가 반영된 조직된 작전”이라고 덧붙였습니다.
남아공 주재 팔레스타인 대사관은 AFP통신에 최근 남아공에 잇따라 도착한 팔레스타인인 두 그룹의 여행이 “가자지구 주민의 비극적인 인도적 상황을 악용한 미등록 사기 단체에 의해 주선됐다”고 주장했습니다. AFP통신은 ‘알마즈드 유럽’ 측에 연락을 시도했으나 웹사이트에 기재된 전화번호는 모두 정지 상태였고, 웹사이트에 링크된 주소는 동예루살렘의 셰이크 자라 지역으로 연결됐다고 보도했습니다. 해당 단체의 실체가 불분명한 만큼, 의혹은 더욱 커지고 있습니다.
팔레스타인 주민의 이주 문제는 어제오늘 이야기는 아닙니다. 지난 8월 이스라엘 N12방송 보도에 따르면, 이스라엘 정부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강제 이주시키는 방안을 인도네시아, 남수단, 리비아, 우간다, 소말릴란드(소말리아 내 분리지역) 등 아시아·아프리카 5개국과 논의 중이라 합니다. 앞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역시 지난 2월 가자지구를 ‘중동의 리비에라’(해안가 휴양지)로 개발하겠다는 구상을 밝히며 이주지로 이집트와 요르단 등을 언급했다가 거센 반발을 산 바 있습니다.
남아공에 도착한 전세기 두 대와 그 안에 탑승한 팔레스타인 주민들은 단순한 난민이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관련 정황은 팔레스타인 주민들의 반강제적 이주가 이미 시작된 것 아니냐는 합리적 의심을 키웁니다. 전쟁의 잿더미 속에서 삶의 터전을 빼앗겼을 뿐 아니라 이제는 어디로 떠밀려야 하는지조차 모르는 처지라면, 이는 명백한 인권 침해이며 국제사회가 좌시해서는 안 될 사안입니다.
박영서 논설위원
실시간 주요뉴스
기사 추천
- 추천해요 0
- 좋아요 0
- 감동이에요 0
- 화나요 0
- 슬퍼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