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서 논설위원
미 연방정부 역사상 최장의 셧다운(일시적 업무정지) 종료 후 ‘승리’를 선언했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곧바로 암초를 만났다. 이미 사망한 억만장자 성착취범 제프리 엡스타인이다. 최근 공개된 엡스타인의 생전 이메일에 트럼프 대통령이 그의 성범죄를 알고 있었다는 내용이 담기면서, 한동안 가라앉았던 ‘트럼프-엡스타인 커넥션’이 다시 소환되고 있다.
숱한 스캔들에도 지지율이 크게 흔들리지 않아 ‘테플론(이물질이 붙지 않는 특수소재) 정치인’으로 불려온 트럼프 대통령이지만, 내년 중간선거를 앞두고 이번 사안은 결이 다르다는 분석이 나온다. 트럼프에 대한 정치적 충성도가 가장 높은 마가(MAGA·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진영 내부에서부터 균열의 조짐이 감지되고 있기 때문이다.
15일(현지시간) 로이터통신은 트럼프 대통령의 충실한 지지자 (마가) 중 다수는 트럼프 행정부가 엡스타인과 관련된 ‘민감 문서들’을 공개하지 않고 있다고 생각한다고 전했다. 로이터·입소스 여론조사 역시 이런 흐름을 뒷받침한다. 지난달 여론조사에서 공화당원 10명 중 9명이 트럼프 대통령의 백악관 운영 전반은 지지했지만, 엡스타인 파일 처리를 지지한다는 공화당원은 10명 중 4명에 불과했다.
공화당 전략가인 테리 설리번은 “엡스타인 문제가 자연히 사라질 것이라 기대했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며 “사실상 해결이 불가능한 사안”이라고 말했다. 민주당 전략가 피아 카루손은 “엡스타인과 관련한 새로운 폭로가 계속된다면 내년 중간선거에서 공화당 지지자들의 투표 참여가 위축될 수 있다”고 분석했다.
정치적 파장은 이미 의회로 번지고 있다. 엡스타인 문제에 있어 공화당의 단일 대오는 흐트러졌고, 민주당은 엡스타인을 끌어오는 데 성공했다. 셧다운 종료로 연방정부 업무가 재개된 날, 법무부에 엡스타인 관련 수사 자료를 전부 공개하도록 요구하는 법안을 표결에 부치자는 청원이, 필요한 서명 수를 모두 채운 것이다.
주목할 점은 서명 명단이다. 하원 민주당 의원 전원은 물론이고 공화당 의원 4명도 이름을 올렸다. ‘트럼프 충성파’로 분류되는 로렌 보버트, 낸시 메이스 공화당 하원의원까지 청원에 서명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장악력을 과시해온 하원에서조차, ‘엡스타인 문제만큼은 그대로 끌려갈 수 없다’는 신호가 발신된 셈이다. 로이터 통신은 “트럼프 대통령이 중간선거를 앞두고 당내 분열을 막기 위해서는 소수 의견을 신중하게 처리해야 한다는 점을 환기시킨다”고 전했다.
민주·공화 양측의 전략가들이 공통으로 지적하는 건, 엡스타인 스캔들의 ‘지속력’과 ‘뉴스 장악력’이다.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소멸할 것이라는 기대와 달리, 스캔들을 덮거나 피하려는 백악관의 시도 때문에 관심이 오히려 지속됐다는 게 정치 전문가들의 시각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금까지 수많은 논란과 스캔들에도 불구하고 지지층을 결집시켜 왔지만, 이번 엡스타인 문제는 상당히 복잡한 변수다. ‘테플론 트럼프’라는 별명이 이번에도 유효할지, 아니면 엡스타인이라는 이름이 처음으로 그 방탄 이미지를 갉아먹는 계기가 될지, 전세계는 주의 깊게 지켜보고 있다.
박영서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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