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김건희 시계’로 유명세를 치른 시계가 있다. 사실 그 다섯 자로 불리기엔 비교할 수 없는 역사와 명성, 그리고 위상을 갖춘 명품 시계 브랜드 ‘바쉐론 콘스탄틴’.
스위스 시계 장인의 역사를 품고 올해로 메종(공방) 설립 270주년을 맞은 바쉐론 콘스탄틴에는 어떤 철학과 유산이 녹아 있을까.
최근 언론 보도엔 ‘바슈롱 콩스탕탱’이란 이름이 등장했다. 김건희 특검팀이 5000만원대 시계의 보증서와 상자를 확보했다는 소식이 전해졌을 당시, 여러 사람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스위스 시계인 줄 알았는데 뜬금없이 프랑스어라니.
계기는 아름답지 못했으나, 이 브랜드의 태생지가 스위스의 불어권 지역이라는 지식은 그렇게 습득됐다. 그러고 보니 올해 바쉐론 콘스탄틴이 메종 설립 270주년을 기념해 파리 루브르박물관에서 공개한 시계 이름도 불어였다. ‘라 꿰뜨 뒤 떵’.
이 글로벌 명품 시계 브랜드의 출발점은 1755년, 스위스 불어권 도시인 제네바의 한 작은 시계 공방이다. 창업자 장 마크 바슈롱이 본인의 이름을 걸고 차린 곳이다.
바슈롱 가문은 기술을 계승하며 19세기 내내 경영권 유지해 왔는데, 특히 창업자의 3대손 자크 바르톨로메 바슈롱이 사업가인 프랑소아 콩스탕탱과 손잡고 1819년 ‘바슈롱 앤 콩스탕탱’을 설립하면서 큰 전환점을 맞는다. 바슈롱과 콩스탕탱 가문은 사업 관계를 넘어 혈연적 유대 관계까지 맺게 되는데, 자크 바르톨로메 바슈롱의 외동딸과 콘스탕탱 집안의 친척이 혼인하면서다.
바슈롱 3대손과 프랑소아 콩스탕탱의 파트너 관계는 제네바 작은 공방에서 만들어진 장인의 시계가 글로벌 럭셔리 브랜드로 진화하는 출발점이 된다. 프랑소아 콩스탕탱의 유통 네트워크를 타고 유럽 귀족 사회 전역으로 시계가 확산된 것이다.
러시아 황실, 덴마크 왕실, 프랑스·스웨덴의 귀족 가문에 ‘바슈롱 앤 콩스탕탱 정밀 제작 시계공방’이라 새겨진 시계가 납품됐다.
장인과 사업가의 협업은 기술과 상업의 빠른 결합으로 이어졌고, 그 과정에서 200년 넘게 지속될 확고한 브랜드 철학도 생겼다. 1819년 프랑소아 콩스탕탱이 남긴 한 문장, “가능한 한 더 잘하라. 그것은 언제나 가능하다”가 바로 그것이다.
브랜드 철학까지 확립된 바쉐론 콘스탄틴은 1843년 제네바 론강의 섬, ‘뚜르 드 릴’의 시계탑에 워크숍을 열었고, 1875년엔 워크숍을 케 드 물랭으로 확장 이전했다. 1906년엔 시계탑에 1호 부티크가 열렸다.
하지만 대공황과 세계대전은 이런 사세 확장의 흐름을 막아섰다. 1929 대공황에 직면하면서 고급 시계 수요 급감이라는 위기를 맞은데 이어 2차 세계대전까지 발발하면서 국제 유통망은 망가졌다. 가업 체제로는 더는 버틸 수 없는 상황이었다.
1940년 제작·디자인은 가문 구성원이 담당하고, 경영 실무는 전문가가 맡는 준(準)전문경영 체제로전환하는 것으로 돌파구 찾기에 나섰으나 녹록지 않았다. 더 큰 위기는 1970년대에 왔다.
일본의 전자식 쿼츠 시계 출시로 스위스의 기계식 시계 산업이 붕괴되면서 바쉐론 콘스탄틴 역시 구조조정을 피해갈 수 없었고, 실질적인 의미의 전문 경영체제도 도입됐다. 가문 출신들은 상징적인 역할만 맡게 됐고, 이때 상호도 지금의 ‘바쉐론 콘스탄틴’으로 단순화됐다.
이제 가문의 유산은 리치몬트그룹으로 넘어간 상태다. 기술력은 최고지만 스위스 시계 산업의 재편이란 흐름에서 더는 독자 생존이 어려워진 바쉐론 콘스탄틴은 1996년 리치몬트그룹에 인수됐다. 바쉐론 콘스탄틴은 리치몬트 산하에서도 브랜드 로고인 ‘몰타 십자가’, 슬로건 등 창립 정신을 유지하며 브랜드의 가치를 높여가고 있다.
창립 270주년, 바쉐론 콘스탄틴은 지금 시계장인의 ‘초심’으로 승부를 걸고 있다. 브랜드 탄생의 본거지 ‘뚜르 드 릴’의 모습을 다이얼에 담아 낸 손목시계를 선보인 것. “가능한 한 더 잘하라. 그것은 언제나 가능하다”는 브랜드 철학을 고수하며 기술적, 예술적, 상업적 우위를 지켜나가는 명품 시계. 그것이 바쉐론 콘스탄틴이다.
김수연 기자(newsnews@dt.co.kr)실시간 주요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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