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란 맘다니(34) 민주당 후보가 미국 뉴욕시장으로 선출됐다. 뉴욕시 역사상 처음으로 무슬림 시장이 탄생한 것이다. 미국 최대 도시이자 세계 자본주의 심장부인 뉴욕에서 이슬람 신앙을 가진 지도자가 탄생했다는 사실은 미국 사회의 다양성이 한 단계 성숙했음을 상징한다. 그러나 이는 하루아침에 온 것이 아니다. 종교적 편견과 인종적 차별을 넘어선 많은 무슬림 인사들의 도전과 헌신이 있었다.
미국 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무슬림은 권투 선수 무하마드 알리다. 처음 링에 올랐을 때 그의 이름은 캐시어스 클레이(Cassius Clay)였다. 그는 18세의 나이에 로마 올림픽 금메달을 거머쥐었고, 곧 프로 무대에서 눈부신 상승세를 타며 주목을 받았다. 하지만 그는 미국 사회의 뿌리 깊은 인종차별에 깊은 회의를 느꼈다. 그는 흑인 해방을 주창하는 무슬림 단체 ‘네이션 오브 이슬람’의 가르침에 끌려 기독교에서 이슬람교로 개종했다.
그는 1964년 2월 소니 리스튼과의 대결에서 ‘나비처럼 날아서 벌같이 쏘아’ 세계 헤비급 챔피언에 등극했다. 그리고 “나는 가장 위대하다”고 외쳤다. 다음달 그는 새 이름을 얻었다. 그는 “내 이름은 더 이상 캐시어스 클레이가 아니다. 그것은 노예의 이름이다. 나는 무하마드 알리다”라고 선언했다.
‘클레이’이란 성(姓)은 그의 증조부가 백인 주인에게서 물려받은 이름이었다. 알리의 조상들은 노예였다. 남북전쟁 후 노예제가 폐지되자 노예들은 대체로 백인 주인의 성을 부여받았다. 즉, ‘클레이’에는 억압과 굴종의 흔적이 보이는 것이다.
반면, 그가 새롭게 택한 이름 ‘무하마드 알리’는 완전히 다른 의미를 지닌다. ‘가장 많이 찬양받는 자’(Muhammad)와 ‘고귀한 자’(Ali)라는 뜻이다. 그의 개명은 굴종의 역사와 백인 사회의 억압에서 벗어나려는 정치적·정신적 선언이었다
그러나 당시 미국 언론과 백인 사회는 그를 배신자, 과격분자로 간주했다. 권투 경기를 방송하는 방송사들은 그의 이름을 ‘알리’로 부르기를 거부했다. 계속 ‘클레이’라고 불렀다.
이는 링 위에서도 같았다. 1965년 전(前) 헤비급 챔피언 플로이드 패터슨은 알리에게 도전하며 그를 끝까지 ‘캐시어스 클레이’라고 불렀다. 패터슨은 독실한 카톨릭 신자이자 온건한 통합주의자였다. 그런 그에게 알리의 개명과 무슬림 신앙은 미국 사회에 대한 도전처럼 비쳤던 것이다.
1967년 어니 테럴과의 헤비급 타이틀 경기 때도 그랬다. 테럴 역시 인터뷰와 기자회견에서 알리를 고의로 ‘캐시어스 클레이’라 부르며 조롱했다. 분노한 알리는 링 위에서 테럴을 몰아붙이며 주먹을 날릴 때마다 이렇게 고함을 쳤다. “내 이름이 뭐라고? 어? 내 이름이 뭐라고?” (What‘s my name? huh? what’s my name?)
이는 “나의 존재를 인정하라”는 정체성의 외침이었다. 이 장면은 중계 카메라와 마이크에 그대로 담겨 전 세계로 퍼졌다.
이렇게 한 바탕 ‘십자군 전쟁’을 벌인 그에서 더 크고 무서운 전쟁이 기다리고 있었다. 바로 미국 정부와의 전쟁이었다. 미국 정부는 그를 징집했고 1967년 4월 알리는 징집을 거부했다. 그의 항변은 이러했다. “나는 베트콩과 아무 원한이 없다. 그들은 나를 ‘검둥이’(Nigger)라고 부르지 않는다. 내가 왜 그들에게 총을 쏴야 하나? 내 적은 베트남이 아니라, (내 고향) 루이빌의 인종차별이다.”
두 달 후 1심 재판에서 알리는 실형을 선고 받았고, 뉴욕주 체육위원회는 그의 선수권을 박탈하고 권투 면허도 정지시켰다. 알리는 영웅에서 범죄자로, 세계 챔피언에서 무직의 흑인 남자로 추락했다.
그러나 알리는 다시 일어섰다. 32세 ‘노장’ 알리는 1974년 10월 아프리카 콩고 킨샤사에서 펼쳐진 ‘정글의 혈전’에서 조지 포먼에 KO승을 거두며 다시 세계 챔피언 자리에 올랐다.
은퇴 후 알리는 인도주의 활동과 인권운동에 헌신했다. 1990년에는 이라크를 직접 찾아 미군 포로 석방 협상을 이끌기도 했다.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 개막식에선 마지막 성화 점화자로 등장해 전 세계인에게 감동을 주었다. 파킨슨병으로 인해 떨리는 손으로 성화를 들어올렸던 그의 모습은, 인간 의지의 상징으로 남아 있다.
알리의 뒤를 이은 세대 가운데 주목할 만한 인물은 ‘스카이 훅슛’으로 유명한 카림 압둘자바다. 그는 70~80년대 20년 동안 美프로농구(NBA)에서 활약했던 전설의 선수다.
원래 이름은 루 앨신더였다. 말콤 X의 자서전은 그에게 ‘흑인으로서의 자존과 영적 자유’를 깨닫게 한 결정적 계기가 됐다. 그는 1971년 개종을 공식적으로 밝히면서 이름을 ‘카림 압둘자바’로 바꿨다. 카림(Kareem)은 ‘너그러운 자’, 압둘자바(Abdul-Jabbar)는 ‘전능하신 신의 종’이라는 뜻이다. 그는 훗날 회고록에서 이렇게 썼다. “나는 교회에선 흑인이라 환영받지 못했지만 모스크에선 인간으로 환영받았다.”
그는 코트 위에서는 침착한 전사였고, 코트 밖에서는 지성인이었다. 그는 흑인 청년의 교육, 인종 평등, 포용사회를 주제로 대학·공공기관 등에서 꾸준히 강연했다. 그는 흑인 무슬림으로서 정체성과 신앙의 균형을 보여준 대표적인 인물로 꼽힌다.
그리고 이제 무슬림 정치인의 시대를 연 인물이 등장했다. 바로 맘다니다. 그는 9·11 테러의 상처가 아직도 남아있는 뉴욕에서 무슬림 정체성을 당당히 드러내며 선거 운동을 펼쳤다. 선거운동 내내 거센 반(反)이슬람 공세가 이어졌다. 일부 언론은 그의 종교를 문제 삼았고, 일부 인사는 그를 “테러리스트의 대변자”라고 비난했다. 하지만 맘다니는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뉴욕에는 100만명의 무슬림이 산다”면서 “이제 그들을 대변할 정치인이 필요하다”고 맞받았다.
당선이 확정된 밤, 그는 아랍어 인삿말로 선거 승리 연설을 시작했다. “아나 밍쿰 와 알라이쿰(나는 당신의 일원이며, 당신들과 함께합니다).” 이는 9·11 테러 이후 오랜 시간 혐오와 배제를 견뎌온 무슬림 공동체가 마침내 정치적 주체로 우뚝 섰다는 것을 보여준 역사적 장면이었다.
비록 미국 내 무슬림은 전체 인구의 1% 남짓에 불과하지만, 그 존재감은 이제 미국 사회의 다양성을 논할 때 결코 빠질 수 없는 색깔이 되었다. 편견을 넘어선 신뢰, 차별을 넘어선 참여, 그리고 신앙을 넘어선 인간적 존엄, 이것이 바로 오늘의 미국 무슬림들이 써 내려가고 있는 ‘새로운 열전(列傳)’의 주제다.
박영서 논설위원(pys@dt.co.kr)실시간 주요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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