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원갑 KB국민은행 부동산 수석전문위원
지난해 기준 국내 아파트는 전체 주택의 65.3%를 차지한다. 세계적으로 보기 드문 ‘아파트 공화국’이 된 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한국에서 아파트는 단순한 주거 공간을 넘어 현대화, 고급화, 그리고 부유층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만약 유럽처럼 아파트가 노동자 계층을 위한 값싼 임대주택으로 인식되었다면, 지금처럼 전국 어디서나 아파트가 들어서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파트에 사는 것이 자랑이 아니라 부끄러운 일로 여겨졌을지도 모른다.
영화 ‘13구역’으로 잘 알려진 프랑스 파리 교외의 아파트 단지는 저소득 이민자들이 밀집한 낙후 주거지의 상징이다. 실제로 교외 아파트촌의 슬럼화가 심각해 폭동이 일어날 정도였다. 영국 역시 아파트라 하면 지방정부가 지은 ‘카운슬 하우징’ 같은 허름한 공공임대주택을 떠올린다. 반면 한국에서 아파트는 처음부터 중산층 이상이 사는 공간, 현대적이고 세련된 주거의 상징으로 받아들여졌다. 유럽에서 싸구려 탱자로 여겨지던 아파트가 한국에 오면서 값비싼 귤로 변한 셈이다. 흔히 말하는 ‘귤화위지’(橘化爲枳)가 아니라 ‘지화위귤’(枳化爲橘)이라 할 만하다.
비슷한 사례로 스팸(Spam)을 들 수 있다. 스팸은 미국에서 탄생했지만 그곳에서는 ‘스팸 메일’이란 표현이 있을 정도로 저급한 이미지가 강하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명절 선물세트로 포장될 만큼 중급 이상의 식품으로 인식된다. 미국 스팸보다 염분을 줄이고 한국인의 입맛에 맞춘 것도 이유지만 더 중요한 요인은 소비층이다. 강남 8학군 학부모들이 자녀 도시락 반찬으로 스팸을 이용하면서 중산층 이상이 먹는 고급 음식이라는 인식이 확산된 것이다. 만약 스팸이 처음부터 노동자층의 저렴한 식품으로 자리 잡았다면 오늘날처럼 고가의 선물용 상품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이처럼 상품의 정체성은 첫 이미지를 만든 소비 주체 계층에 따라 달라진다. 자본주의 사회에선 제품의 품질뿐 아니라 이미지와 상징이 본원적 가치와 부가가치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 아파트 역시 마찬가지다. 현대적이고 부유한 공간이라는 이미지는 단순한 주거의 개념을 넘어 거주 그 자체가 사회경제적 지위의 상징이 되었다. 구매력을 갖춘 계층은 더 높은 값을 지불하면서 ‘고급 아파트’의 상징을 욕망하고 소비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신분을 과시하고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려고 한다.
한국의 아파트는 처음부터 고급 관료, 대학교수, 연예인, 변호사, 대기업 임원 등 사회적으로 성공한 이들이 거주하는 공간으로 인식되었다. 1960년대 아파트가 처음 도입될 당시에는 지금보다 훨씬 고급주택의 이미지가 강했다. 높은 관리비로 인해 고학력·고소득층만이 거주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1967년 서울대 공대 건축학과 주택문제연구회 조사에 따르면 아파트 거주자의 70%, 맨션 아파트의 경우 98%가 초대졸 이상이었다. 1974년 완공된 반포아파트는 32~42평형의 중산층용으로 지어졌지만, 입주 초기에는 ‘반포족’이라는 신조어가 생길 만큼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결국 아파트를 소비한 계층의 특성이 아파트 확산의 방향을 결정한 셈이다.
한국의 아파트는 다른 형태의 주택보다 가격 하락기에는 낙폭이 작고 상승기에는 상승폭이 큰 게 특징이다. 가격이 오르면 수요가 늘고, 수요 증가는 다시 가격 상승을 부르는 ‘가격 증폭의 메커니즘’이 오랫동안 작동해왔다. 이렇게 아파트의 역사는 곧 중산층의 성장과 재테크의 대중화 과정과 맞닿아 있다. 하지만 모든 아파트 수요가 재테크 목적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다. 광주광역시의 경우 2020년 기준 아파트 비중이 80.3%로 광역시 가운데 최고지만 이는 편리함과 효율성을 중시하는 주거 문화의 결과이기도 하다.
아파트는 관리가 쉽고 생활 편의시설이 가깝고 안전성이 높다는 점에서 현대인의 생활방식에 잘 맞는다. 그럼에도 아파트 중심의 주거 문화는 계층 간 주거 양극화를 심화시킨다. 공동체 의식이 약화되고 도시 공간이 획일화되면서 다양성이 사라진다. 결국 한국의 아파트 공화국은 편리함과 효율성이라는 이점을 얻는 대신 사회적 불평등과 문화적 빈곤이라는 대가를 함께 치르게 되었다. 아파트는 한국 근대화의 상징이자 중산층의 꿈이었지만 이제는 그 화려한 외피 속에 우리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비추는 거울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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