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도가도 왕십리
김창희 지음 / 푸른역사 펴냄
서울 동쪽 변두리쯤으로 여겨지던 왕십리를 민초들의 분투와 삶이 응축된 역사적 무대로 되살려낸 책이다. 저자는 ‘가도 가도 끝이 없는’ 왕십리를 저잣거리 민중의 삶이 오고간 자리, 억압과 희망이 교차한 공간으로 탐사한다. 이를 통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성찰을 제시한다.
책 속에서 만나는 인물들은 화려한 이름을 남긴 영웅들이 아니다. 생긴 대로 살고, 주어진 조건 안에서 고민하고 몸부림쳤던 ‘작은 사람들’이다. 갑신정변의 고대수, 임오군란의 김장손, 현대 택견의 선구자 신한승, 만담가 장소팔, 그리고 천주교 순교자와 농부 등 이들의 삶과 죽음이 왕십리에 켜켜이 쌓이며 오늘의 왕십리를 가능케 했다. 그들의 이야기는 슬프고 기구하지만 끝내 인간적인 힘으로 다가온다.
흥미로운 대목은 왕십리를 단순한 인물 열전이 아니라, 지역의 생활사적 맥락과 연결한 점이다. 상여 행렬이 지나던 광희문, 택견이 벌어지던 살곶이다리, 소리꾼들이 모여 연습하던 움집은 모두 그 시대 민초들의 숨결을 고스란히 품은 장소다.
왕십리는 한때 묘지로 향하는 인생의 마지막 길목이었다. 죽음의 땅이자 배제된 자들의 자리였다. 그러나 저자는 왕십리가 ‘주검의 장소’였으나 동시에 ‘새 세상으로 향하는 관문’이었음을 설득력 있게 그려낸다. 한 세대의 좌절과 죽음이 다음 세대의 생명력으로 이어지는 전환의 장, 그것이 왕십리라는 것이다.
책은 ‘왕십리는 살아 있다’라는 문장으로 마무리된다. 이는 단순한 수사가 아니다. 우리가 외면했던 작은 삶의 이야기가 곧 도시의 역사이고, 내일로 이어갈 힘임을 일깨운다. 책은 왕십리를 통해 우리 자신을 비추게 하는, 작지만 묵직한 거울이다.
박영서 논설위원
실시간 주요뉴스
기사 추천
- 추천해요 0
- 좋아요 0
- 감동이에요 0
- 화나요 0
- 슬퍼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