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재권 더밀크 대표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가 지난달 31일 경주에서 열린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기간 중 방한, 이재명 대통령에게 블랙웰급 첨단 GPU 26만장 공급을 약속했다. 총 2.5기가와트 규모로 약 12조원에 달하는 물량이다. 하지만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자사 AI 서밋에서 밝혔듯 현재 한국의 AI 수요는 10메가와트에서 20메가와트 수준에 불과하다. 갑자기 공급이 수요의 100배를 넘어서게 됐다.
그러나 문제는 최신 GPU는 수명이 3년에서 5년이며, 사용하지 않으면 감가상각이 빠르게 진행된다는 데 있다. 3년 후 성능은 절반으로 떨어지고 5년 후면 구형이 된다. 따라서 이 GPU들이 전략자산이 될지 고철덩어리가 될지는 확보 후 3년 안에 결정된다.
GPU 26만장 확보로 한국 AI 산업의 게임 법칙이 바뀌었다. 이전까지는 인프라 부족이 문제였지만 이제는 수요 부족을 해결해야 한다. 실리콘밸리 기업들과 비교하면 차이가 명확하다. 오픈AI는 챗GPT가 1억 유저를 돌파한 후 GPU를 대량 확보했고, 메타는 30억 사용자를 위해, 구글은 검색과 유튜브의 수십억 사용자를 위해 GPU를 확보했다. 이들은 모두 수요가 공급에 선행했다.
한국은 반대다. GPU를 확보하고 활용방안이 따라오는 방식이다. 인프라(야구장)를 만들면 소비자가 찾아올 것이라는 ‘꿈의 구장’ 전략이 됐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결국 수요가 생기는 야구장과 달리 GPU는 사용하지 않으면 급격히 가치가 떨어지는 자산이다.
정부의 역할이 결정적인 이유다. AI 투자는 규모가 크고 리스크가 높아 민간만으로는 초기 수요를 창출하기 어렵다. 정부가 마중물 역할을 해야 민간도 뒤따를 수 있다. 최근 제출한 2026년 정부 예산안에서 과기정통부가 AI 관련 예산 10.5조원을 편성한 것은 파격적이지만 핵심이 빠져 있다. 바로 정부 자신이 AI의 첫 번째 고객이 되는 전략이다.
수많은 AI 기업을 컨설팅한 IBM이 발견한 ‘클라이언트 제로’ 원칙이 해답을 제시한다. 구글, 오픈AI, 앤트로픽 등 성공한 AI 기업들은 자사 제품을 외부에 판매하기 전에 내부에서 먼저 사용했다. 임직원들이 첫 번째 이용자이자 수요처가 돼 제품을 검증했다. 정부도 동일한 접근이 필요하다. 정부 조직과 공무원들이 AI를 가장 먼저 도입하고 활용해야 민간이 따라올 수 있다.
방법이 있다. 첫째, 중앙부처 핵심업무의 AI 전환을 의무화해야 한다. 모든 부처에 AI 전환 예산을 배정하고 부처 성과평가에 반영해야 한다. 이어 사용 방안을 만들어야 한다. 예를 들어 국토교통부는 AI로 실시간 교통 신호를 최적화하고, 복지부는 빅데이터 분석으로 복지 사각지대를 발굴하며, 국세청은 AI 기반 세무조사로 탈세 패턴을 자동 분석하는 방식이다. 이행하지 않으면 차년도 예산을 삭감하는 방식으로 강제성을 부여해야 한다.
둘째, 공공 AI 플랫폼의 선제적 구축이다. 5000만 국민이 무료로 사용하는 범정부 AI 비서를 만드는 것이다. 이 AI로 행정 민원, 세금 상담, 법률 자문, 의료 정보를 제공한다. 카카오톡이나 네이버, 정부24에 통합하면 접근성이 극대화된다. 국민이 하루 한 번씩만 사용해도 월 15억 쿼리가 발생한다. 이는 상당한 GPU 수요를 창출하는 동시에 국민에게 직접적 혜택을 제공한다. 중소 제조업체를 위한 무료 AI 공정 최적화 툴도 배포하고, 전국 초중고에 AI 튜터를 배치해 학생별 맞춤 학습을 지원한다.
셋째, 의료와 산업 현장의 AI 전환에 대한 인센티브 설계다. 의료 AI에 보험 수가를 인정해 병원들이 AI 진단 보조 시스템을 적극 도입하도록 유도한다. 제조업체가 AI로 공정을 개선할 경우 세제 혜택을 주거나 정부 조달 시 가점을 부여하는 방식도 고려할 수 있다.
이 세 가지 방안을 실행하면 정부와 공공기관만으로도 연간 3조~4조원의 AI 수요를 창출할 수 있다. 물론 정부 AI는 국산 공공기관 클라우드(소버린)를 활용해야 국내 생태계가 함께 성장한다.
정부가 확보한 GPU로 AI 스타트업 생태계도 조성할 수 있다. 유망 스타트업에 GPU를 무상 또는 저가로 제공하면 기술 진입장벽이 낮아진다. 1000개 팀 중 10%만 성공해도 100개의 AI 기업이 탄생하고, 이들이 성장하면서 자체 GPU를 구매하는 선순환이 시작된다.
2026년 정부 AI 예산안의 방향은 옳다. 하지만 접근방식을 전환해야 한다. 공급자 지원에서 수요자 촉진으로, 하드웨어 투자에서 생태계 조성으로 무게중심을 이동해야 한다. AI 강국은 GPU 개수만이 아니라 활용도로 결정된다.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많은 GPU가 아니라 GPU를 돌릴 수 있는 명확한 수요다. 그 첫 번째 수요처는 정부와 공무원들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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