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닥터페퍼 제공]
[닥터페퍼 제공]

④ 닥터페퍼

콜라 같지만 콜라는 아니고, 체리향이 감돌지만 체리 음료도 아니다.

1885년 미국 텍사스의 한 약국 판매원 손에서 탄생한 탄산음료 닥터페퍼(Dr Pepper)는 150여년이 지난 지금도 소비자들로부터 ‘무슨 맛이냐’는 질문을 받는다. 그런 닥터페퍼는 글로벌 톱브랜드인 코카콜라·펩시콜라와 치열하게 경쟁하면서도 모호함을 통해 자신만의 영역을 지켜내고 있다. 오랜 모호함은 이 브랜드의 정체성이 됐다.

닥터페퍼는 텍사스 웨이코의 모리슨 약국에서 판매원으로 일했던 찰스 앨더튼(Charles Alderton)이 개발한 탄산 음료다. 브랜드 이름은 이 약국이 ‘페퍼’라는 성을 가진 의사가 처방한 약을 주로 판매해 온 데서 유래됐다. 약국에서 개발된 음료라는 점이 소비자들에게 신뢰감을 주면서 출시 초기부터 인기를 얻었다.

닥터페퍼 맛의 철학은 ‘모호함’이다. 소다 탄산이면서도 과일향의 단맛과 스파이스를 동시에 품고 있어, 정의하기 어려운 맛을 구현한다. 23가지 향료를 섞어 만들어지는데, 체리·카라멜·아몬드·감초 등 다양한 향이 뒤섞여 소비자마다 다르게 인식된다. 이 ‘정의되지 않은 맛’은 닥터페퍼 브랜드의 정체성이다. 코카콜라가 단일한 시그니처 맛으로 정체성을 세운 반면 닥터페퍼는 개인의 감각에 따라 달라지는 주관적 경험을 브랜드화했다.

닥터페퍼는 엄밀히 따지면 콜라가 아니다. 미국 연방법원은 1963년 닥터페퍼가 콜라의 원료가 되는 콜라나무 열매를 성분에 표기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콜라가 아니다’는 판결을 내렸다.

‘탄산과 당도가 센 과일 향 콜라’가 처음 맛본 닥터페퍼를 설명하는 가장 손쉬운 방법이겠지만, ‘콜라’ 부분을 빼야 한다면 설명이 쉽지 않다. 닥터페퍼는 지금도 ‘무슨 맛이냐’는 질문을 받지만, 최근 미국 탄산음료 시장에서 펩시콜라를 누르고 업계 2위에 오르기도 했다. 코카콜라와 펩시콜라가 주도한 양강 구도 속에서 살아남아 이제는 업계 1위를 넘보는 브랜드가 된 셈이다.

닥터페퍼 브랜드를 상징하는 색상인 ‘버건디’ 역시 이 브랜드가 걸어온 길을 함축하고 있다. 버건디는 코카콜라의 빨강과 펩시의 파랑 사이 어딘가에 위치한 색이다. 코카콜라와 펩시가 각각 선명한 색으로 정체성을 구축했다면, 닥터페퍼는 경계선 위에서 존재감을 드러냈다. ‘정의되지 않음’이 닥터페퍼를 상징하는 색상이 된 것이다.

닥터페퍼는 1970년대 ‘Be a Pepper’(너 자신이 돼라) 캠페인을 선보이며 이런 브랜드 철학을 대중적으로 표현했다. 당시 미국에서는 개인주의와 다양성을 중시하는 문화가 확산하던 시기였는데, 닥터페퍼는 그 흐름을 적극적으로 수용해 브랜드 정체성을 강화했다.

같은 시기 광고에서는 ‘The most misunderstood soft drink’(가장 오해받은 탄산음료)라는 문구를 사용하기도 했는데, 모호함을 개성으로 전환해 대중문화의 흐름을 이해하는 새로운 감각을 제시했다.

정체성을 명확히 하지 않음으로써 오히려 선명해진 브랜드. 닥터페퍼는 다른 브랜드와 달리 ‘불확실함’을 통해 자신만의 확신을 증명한 브랜드가 됐다. 명확히 설명할 수 없지만 잊히지 않는 맛, 닥터페퍼는 그 애매함 속에서 소비자와 만나고 있다.

박순원 기자 ssun@d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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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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