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환 KAIST 경영공학부 교수
“요즘에는 환자가 생성형 인공지능(AI) 앱으로 본인 몸 상태를 소상히 진단하고 와서 아예 그에 맞는 처방까지 요청하는 경우가 늘고 있어.” 지난 주에 만난 의사 친구가 들려준 말이다. 디지털 시대를 맞아 자연스레 각광받을 직업 중 하나로 여겨졌던 프로그래밍에도 AI가 빠르게 활용되면서 컴퓨터공학과 졸업생들이 웬만한 능력을 갖추지 못하면 개발자로 취업하기가 오히려 어려워졌다는 얘기도 나온다.
AI 기술 혁신과 보급은 전문가의 권위를 흔들고 있다. 의료, 법률, 회계, 디자인, 교육과 연구까지 하루가 다르게 AI의 활용이 확산되면서 과거에는 오직 숙련된 전문가만이 수행할 수 있던 영역이 자동화되고 있다. 얼마 전 출간된 하버드비즈니스리뷰의 한 아티클은 ‘풍부한 전문성의 시대’(Era of Abundant Expertise)라는 구절을 제목에 넣기도 했다. 전문성의 가치는 희소성에서 나오는 법인데, ‘풍부한 전문성’이라면 사실 더 이상 전문성의 기본 자격 요건을 못 갖추는 셈이다.
한때 ‘전문가’의 판단과 경험이 ‘희소한 자산’이었다면, 이제는 대규모 데이터와 알고리즘이 그 빈틈을 빠르게 메우고 있다. AI가 제시하는 진단, 분석, 설계, 요약의 정확도는 이미 많은 분야에서 개인 또는 집단 전문가의 평균을 넘어섰다. ‘사람 전문가’의 시대에 이어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기계 전문가’의 시대가 열리고 있는 듯한 양상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AI가 사람 전문가를 완전히 대체하는 것은 아니고, 오히려 전문가의 역할이 재정의되고 있다고 보는 편이 더 적절하다. AI는 인간의 손발을 대신해 반복적이고 정형화된 작업을 수행하지만, 그 과정의 의미를 해석하고, 결과를 사회적 맥락 속에서 책임 있게 연결하는 일은 여전히 사람의 몫이다.
전문가의 본질은 단순한 ‘정보처리 능력과 지식 수준’이 아니라, ‘판단의 품격’과 ‘신뢰의 기반’에 있다. 물론 그 자리까지도 AI가 차지할 것이라는 견해도 꽤 있지만, AI가 제시한 결과를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그것이 가져올 영향과 윤리적 함의를 성찰하는 과정에는 여전히 사람이 개입할 가치가 있을 것이다.
AI 기술이 사람의 전문성을 얼마나 위협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보다 기실 더 중요한 것은 과거와 달리 새로운 시대에 요구되는 전문가의 조건을 파악하고 대비하는 것이다. 첫째, AI 리터러시, 즉 인공지능의 작동 원리와 한계를 이해하고 적절히 활용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다. 단순히 기술을 사용할 줄 아는 수준을 넘어, 어떤 데이터가 왜 특정한 결과를 낳는지 해석할 수 있어야 한다. 둘째, 융합적 사고를 통해, 전문성의 깊이를 추구하는 동시에 다른 분야와 연결시켜 문제를 재구성할 수 있어야 한다. 의사는 데이터 과학자의 사고를, 변호사는 기술윤리의 관점을 이해해야 하는 시대다. 셋째, 관계와 신뢰를 구축하는 능력이 핵심 자산이 된다. AI가 분석을 대신하더라도, 인간 사이의 공감과 유대는 대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작금의 변화는 개인의 커리어 전략에도 근본적인 수정을 요구한다. ‘전문성 하나로 평생을 버틴다’는 방식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지속적인 학습과 재훈련을 통해 AI 시대의 도구를 자기 영역 안으로 끌어들여야 한다. 전문가로 생존할 길은 AI와의 경쟁이 아니라 AI와의 협력에 있다. 자신의 전문성을 AI의 힘으로 확장하고, AI가 제공하는 데이터를 새로운 통찰로 전환할 수 있는 사람이 미래의 전문가다.
기업의 전략 역시 달라져야 한다. 전문가 조직을 유지하는 방식에서 ‘AI-휴먼 하이브리드’ 모델로의 전환이 필요하다. 단순히 비용 절감을 위한 자동화가 아니라, 전문가의 역량을 데이터와 연결해 새로운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구조로 바꿔야 한다. 예를 들어, 컨설팅 회사는 AI 분석 엔진을 활용해 고객 문제를 실시간으로 진단하고, 사람이 그 결과를 해석해 맞춤형 전략을 제시하는 식이다. 즉, AI는 효율을, 전문가는 신뢰와 소통을 담당하며 두 요소가 함께 경쟁력을 강화할 수 있다.
기술 혁신은 언제나 인간의 역할을 축소시켜온 동시에, 새로운 역할을 창출해왔다. AI 시대의 전문가는 ‘지식의 보유자’가 아니라 ‘지식의 조율자’, ‘판단의 설계자’로 진화해야 한다. AI가 일을 대신하는 시대일수록, 인간 전문가에게 요구되는 것은 더 깊은 통찰력, 더 높은 윤리의식, 그리고 기술을 이해하는 지적 겸손이다. AI를 두려워하는 전문가가 아니라, AI를 동반자로 인식하고 주체적으로 자신의 고유 능력을 개발하는 전문가의 희소가치는 미래에도 충분히 인정받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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