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천히, 서둘러라’… 현대 출판인의 효시 ‘알도 마누치오’ 전시

국립세계문자박물관, 로마·베네치아 도서관과 협업

'알도 마누치오' 초상화. 국립세계문자박물관 제공
'알도 마누치오' 초상화. 국립세계문자박물관 제공

알도 마누치오(1449∼1515)는 한국에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지만, 모두가 익숙하게 받아들이는 대중 독서 문화의 출발점을 연 '출판 혁신가'로 꼽힌다. 유럽에서 구텐베르크(1398~1468)가 인쇄술을 발명한 시절, 책은 여전히 쇠사슬로 묶어 보관할 정도로 값비싸 귀족과 성직자의 전유물이었다. 마누치오는 책을 휴대할 수 있는 '옥타보(8절판)' 판형으로 줄여 누구나 읽고 다닐 수 있는 '포켓북'의 개념을 확립했다.

당시 베스트셀러라고 불릴 만큼 대량 인쇄 체제도 마련했다. 지금도 쓰이는 이탤릭체를 도입해 가독성도 높였다. 정확한 주석과 문장부호 체계도 확립했다. 지식 전달 방식 자체를 개혁한 셈이다. 출판 업계에서 그를 '르네상스 시대의 스티브 잡스'로 부른다. 당시 책을 혁신한 일은 잡스가 스마트폰 시대를 연 것과 비견할만하다는 뜻이다. 이정연 국립세계문자박물관 학예사는 지난 24일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기술의 시작이 구텐베르크라면, 독서 문화를 만든 사람은 마누치오"라고 설명했다.

'지리학'. 국립세계문자박물관 제공
'지리학'. 국립세계문자박물관 제공

국립세계문자박물관에서 열리는 이번 전시는 마누치오 가문의 세대를 함께 조명하면서 출판이 사회문화적 영향을 끼친 과정을 한 흐름으로 보여준다. 출판이 단순히 책을 찍어내는 산업이 아니라 사회 구조를 변화시킨 기반이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로마 남쪽의 바시아노 출신 교육자였던 마누치오가 베네치아로 건너가 '알디네 인쇄소'를 세운 뒤 그의 아들과 손자까지 바티칸 인쇄소에서 활동하면서 지식 확산에 나선 여정이 재현된다.

마누치오의 철학은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좌우명에서 빌려 온 '천천히, 서둘러라'다. 그의 출판물에는 닻에 몸을 감은 돌고래 모양의 문양이 새겨져 있다. 닻은 신중함을, 돌고래는 속도와 기민함을 뜻한다. 빠르고 정확하게 책을 내는 인쇄소의 사훈에 딱 맞았다. 예상치 않았지만, 이 문양은 위조와 불법 복제가 빈번한 르네상스 출판 시장에서 진본 보증 기능도 했다.

'시에나 성녀 카타리나의 가장 경건한 편지'. 국립세계문자박물관 제공
'시에나 성녀 카타리나의 가장 경건한 편지'. 국립세계문자박물관 제공

출판인으로서 마누치오는 정확성에 집착했다. 기존 책들이 원본과 멀어진 채 오류투성이로 유통되는 현실을 문제 삼았다. 학자들과 협업해 주석, 철자, 문장부호를 바로잡았다. 인쇄 기술의 목적이 '복제'보다 '지식의 전달'이어야 한다는 신념이었다. 당시 최고의 필경사들이 쓴 글씨체를 연구해 읽기 좋은 서체를 개발하는 데도 전념했다. 오른쪽으로 기울어진 이탤릭체는 필경사 바르톨로메오 산비토의 필체를 본떠 만들었다. 이는 1500년 '시에나의 성녀 카타리나의 가장 경건한 편지'에 처음 등장한다.

스테파노 캄파뇰로 로마국립중앙도서관장은 디지털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돌고래와 닻의 인쇄 마크로 알려진 그 출판 가문의 3대 전체를 봐야 한다"며 "알도 마누치오가 쌓은 신뢰가 아들 파올로에게 이어져 공의회 이후 교회 내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됐는데, 이는 출판이 문화·종교적 삶에 의미 있는 기여를 했음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500여년 전 그의 철학은 AI 기술이 정보 생산력을 비약적으로 높이고 있는 시대에도 유효하다. 허위 정보 확산 문제가 제기되는 현 시점에서 정확성과 신뢰를 놓쳐서는 안 된다는 메시지를 던진다. 캄파뇰로 관장은 "디지털 혁명은 필사본을 금속활자가 대체하던 15세기와 매우 닮았다"며 "당시 사회가 어떻게 대응했는지 연구하는 것은 오늘에도 유효하다"고 강조했다.

이번 전시는 국립세계박물관의 제안에 로마 국립중앙도서관과 베네치아 국립마르차나도서관이 호응해 성사됐다. 1876년 설립된 이탈리아 최대 도서관인 로마국립중앙도서관은 이탈리아 학술·문화 연구의 핵심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베네치아 국립마르차나도서관(16세기 중반 설립)은 이탈리아에서 가장 오래된 도서관 중 하나로, 고문서와 필사본 등 폭넓은 문화유산을 소장하고 있다.

특히 마누치오 가문의 3대 전시가 열린 것은 전세계적으로도 이례적으로, 유럽의 국립도서관 관련 기관장 협의체인 유럽국립도서관장회의(CENL)에도 소개됐다. 캄파뇰로 관장은 이번 전시에 대해 "서로에게 닮은 점이 많고 나눌 이야기가 많은 두 문화 사이를 잇는 계기"라고 설명했다.

'베르길리우스 전집'. 국립세계문자박물관 제공
'베르길리우스 전집'. 국립세계문자박물관 제공
단테 지옥도(신곡). 국립세계문자박물관 제공
단테 지옥도(신곡). 국립세계문자박물관 제공

전시장에서는 '뉘른베르크 연대기', '폴리필로의 꿈', '베르길리우스 전집', 단테의 '신곡' 개정판인 대형 목판화 '지옥도' 등 독서 경험을 변화시킨 인쇄물을 볼 수 있다. 베르길리우스 전집은 마누치오가 이탤릭체 활자와 8절판형을 처음 전면 사용해 인쇄한 최초의 '엔키리디아'(손에 들고 다니는 책)로, 유럽 인쇄사의 전환점으로 꼽힌다.

서문에서 마누치오는 "그리스어 문헌에서 선보였던 문자들을 이제, 그대들이 보는 바와 같이, 라틴어 문헌에도 가져오니, 이는 볼로냐의 프란체스코가 지닌 숙련된 손길로 빚어진 것이다"라고 썼다.

이와 함께 '마르티알리스 시집'의 원본과 위조본을 비교한 전시는 지식 신뢰성과 저작권 문제의 출발점을 다룬다. 전시 말미에 놓인 로마 콜로세움 추정 정면도 판화는 전세계에 단 세 장만 남은 희귀 자료다.

출판사 '윌라' 협업 체험존. 국립세계문자박물관 제공
출판사 '윌라' 협업 체험존. 국립세계문자박물관 제공

이번 전시의 또 다른 묘미는 현재와 과거를 연결하려는 시도다. 전자책과 오디오북을 직접 체험할 수 있도록 구성해 과거의 독서 혁신과 현재의 변화를 한 자리에서 비교해볼 수 있도록 했다. 이정연 학예사는 "관람객들이 과거의 책만 보는 것이 아니라 현재 우리가 책을 어떻게 읽고 있는지 함께 성찰할 수 있게 했다"고 설명했다.

캄파뇰로 관장은 "르네상스의 위대한 예술적 번영은 사실상 라틴어와 그리스 고전 문화의 재발견과 공유를 바탕으로 이뤄졌다"며 "출판과 인쇄의 영역에서 알도 마누치오의 역할은 지식의 확산에 놀라운 촉매 역할을 했다"고 덧붙였다.

서거 500년을 맞은 마누치오는 1515년 세상을 떠났다. 역사가 마린 사누도에 따르면, "그의 시신은 온통 책들로 둘러싸인 채" 안치됐다. 책과 함께 평생을 인문주의의 길을 걷은 학자이자 출판인의 아름다운 말로다.

한국과 이탈리아 수교 140주년을 기념해 마련된 이번 전시는 28일부터 내년 1월 25일까지 인천 송도의 국립세계문자박물관에서 열린다. 국립세계문자박물관은 이번 전시를 통해 이탈리아 국립도서관 2곳과 업무협약을 체결하고 공동연구, 교류 전시를 활발히 할 예정이다.

김나인 기자 silkni@d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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