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한나 산업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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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김수영 시인의 대표작 <풀>의 한 구절이다. 중국의 공급망 공세와 미국의 보호무역 회귀, 여기에 관세 장벽까지 겹친 거센 바람 속에서 버티고 있는 국내 배터리 기업들을 보면 문득 떠오르는 대목이다.

그러나 시장의 바람은 오히려 더 거세지고 있다. 글로벌 전기차 시장은 폭발적인 성장세다. 올해 상반기 전 세계 전기차 판매는 전년 동기 대비 34% 이상 증가했다.

매년 20%가 넘는 전기차 성장률을 숫자 그대로 보면 ‘캐즘’(Chasm·일시적 수요 정체)이라는 단어는 이 시장을 설명하기엔 낡았다. 이미 조용히 지나갔거나, 확장이 계속되고 있어 애초에 ‘진짜’ 캐즘은 시작도 안 한 게 논리적으로 더 타당하다.

문제는 시장이 아니라 우리다. 그 성장의 한가운데서 한국 배터리 기업의 존재감은 옅어지고 있다. 시장은 커졌는데 우리의 성장 속도는 거기에 미치지 못했다. 어쩌면 그 간극을 캐즘이라는 변명의 언어로 1년 넘게 덮어온 건 아닐까.

배터리 시장 점유율만 봐도 현실은 분명하다. 중국 CATL이 37.9%, BYD가 17.8%로, 두 중국 기업이 글로벌 시장의 절반을 장악했다. 한국 3사의 점유율은 18% 남짓. 시장은 커졌는데 우리는 멈춰 있었다.

불과 2~3년 전만 해도 상황은 달랐다. 2022년 한국 배터리 기업들은 글로벌 완성차의 주요 공급망을 주도했다. 중국은 내수 중심이었고 기술력과 품질 면에서 한국이 단연 앞섰다는 평가가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중국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중국은 막대한 자본과 정부 주도의 산업 전략으로 기존 기술을 빠르게 흡수해 새 길을 열었다. 기술을 베끼는 수준을 넘어 산업 전체를 설계할 줄 알게 됐다. 가격·물량·공급망 3박자를 모두 확보하며 더 싸고, 더 빠르고, 더 과감해졌다.

그 결과 BYD를 비롯한 중국 기업들은 유럽과 동남아, 중남미로 확장하며 세계 시장의 질서를 다시 쓰고 있다. 중국의 지난해 전기차 판매대수는 1100만대 이상으로 이미 글로벌 시장의 약 65%를 차지했다.

이 와중에 미·중 관세 전쟁도 새로운 리스크다. 미국과 유럽 내 현지 투자 부담은 커지는데 한국은 협상력이 약해 미국으로부터 보호무역의 이익도 얻지 못하고 있다. 관세와 환율, 원자재 가격까지 불리하게 작용하며 한국의 수출 경쟁력은 빠르게 약화하고 있다. 한국의 성장 둔화가 시작된 진짜 캐즘이 조용히 다가온 셈이다.

내년에는 캐즘 탓도 할 수가 없다. 캐즘을 탓하기 전에 스스로의 한계를 돌아볼 때다. 시장이 아니라 우리가 그동안 못하고 있던 것이다. 가격 경쟁력뿐 아니라 차별화된 성능과 안전성을 갖춘 배터리를 내놓지 않으면 커지는 시장은 결국 남의 것이 될 것이다.

결국 해법은 제품이다. 시장이 커질 때 진짜 승자는 ‘빠른 자’가 아니라 ‘더 나은 제품을 내놓은 자’였다. ‘눕더라도 다시 일어나는 풀처럼’, 지금 한국 산업에 필요한 건 거센 바람을 이길 기술뿐이다.

박한나 기자(park27@d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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