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원갑 KB국민은행 부동산 수석전문위원

지난 여름, 서울 여의도의 한 지하상가는 평일 낮에도 인파로 북적였다. 폭염을 피해 나온 시민들로 쇼핑가 식당가는 문전성시를 이뤘다. 같은 시각, 지상의 거리 상점들은 상대적으로 한산한 모습이었다. 이 풍경은 단순한 계절적 현상이 아니라 기후변화가 도시 상권에 가져오는 구조적 변화를 보여주는 사례다.

최근 몇 년 사이 이상기후는 더는 특별한 일이 아니다. 기상청에 따르면 올 여름(6~8월) 우리나라 전국 평균기온은 25.7℃로 지난해보다 0.1℃ 높아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다. 폭염 일수는 28.1일로 평년보다 17.5일이나 많았다. 6월부터 시작된 더위는 8월 말까지 이어지며 일상생활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이상기후는 자연스럽게 사람들의 동선과 소비 패턴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상권은 유동 인구에 따라 부침을 오가는 유기체 성격을 띤다. 무더위나 혹한 같은 극단적인 날씨는 사람들의 이동을 제한하기 마련이다. 그 결과 외부에 노출된 거리형 상가나 전통시장은 타격을 받는다. 여름에는 그늘이 부족하고 냉방이 어렵고, 겨울에는 칼바람과 눈에 그대로 노출된다. 날씨가 나쁘면 방문객이 줄고, 이는 매출 하락과 공실 증가로 이어지는 악순환을 불러온다.

반면, 실내 공간 중심의 지하상가나 대형 복합몰은 날씨 변화에 관계 없이 방문객을 끌어들인다. 무더운 여름철에는 오히려 더 많은 사람이 몰린다. ‘몰캉스’(쇼핑몰+바캉스)라는 말도 이젠 낯설지 않다. 롯데월드몰, 스타필드, 코엑스 같은 대형 복합몰은 단순한 쇼핑 공간을 넘어 일상 속 여가와 휴식 공간으로 자리잡고 있다.

지하상가에 대한 인식도 달라지고 있다. 예전에는 낡고 어두운 이미지가 강했다. 지하상가를 ‘남의 건물 지하’로 생각할 정도로 거부감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최근에는 딴판이다. 서울 광화문, 을지로, 종로, 강남, 여의도 신축 메머드급 오피스 건물 지하 상가를 한번 가보라. 각종 SNS(사회관계망서비스) 맛집이 들어서면서 ‘핫 플레이스’로 주목받고 있고, 점심시간에는 직장인들로 넘쳐난다. 이제는 도심 재정비사업에서도 지하 공간 활용은 흔한 전략이 됐다. 활용 가능한 공간을 극대화해 개발 수익을 높일 수 있기 때문이다.

대형 복합몰의 변화도 눈에 띈다. 단순히 물건을 파는 곳이 아니라, 외식, 문화, 키즈 콘텐츠 등 다양한 활동이 결합된 공간으로 진화하고 있다. 코로나19 팬데믹(대유행) 이후 사람들은 단순한 소비보다 경험을 중요하게 여기게 됐다. 쾌적하고 안전한 실내 공간에서 가족이나 친구와 함께 시간을 보내는 방식이 새로운 일상이 된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일시적인 유행이 아니다. 앞으로는 실내 중심의 ‘기후 회피형 공간’과 특별한 경험을 제공하는 ‘목적형 공간’ 중심으로 상권이 양극화될 가능성이 크다. 기후변화가 가속화되면서 상업 공간도 이에 맞춰 적응해야 한다.

전통시장이나 거리형 상가는 단순한 유통 기능만으로는 경쟁력을 유지하기 어렵다. 지역 고유의 정체성과 전통, 문화 콘텐츠, 체험 요소 등을 적극적으로 결합한 차별화 전략이 필요하다. 여기에 더해 고령화, 1인 가구 증가, 비대면 소비 확대 등 구조적인 변화가 겹치면서 날씨는 이제 새로운 위협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정책적인 대응도 시급하다. 기후에 탄력적인 상업 인프라 설계, 지상과 지하 상권의 연결 강화, 전통시장 냉난방 개선, 스마트 상권 데이터 구축 등 다양한 전략이 함께 추진돼야 한다. 도시 상권을 입체적으로 재편하는 노력이 필요한 시점이다.

기후는 단순한 환경 문제가 아니다. 도시의 소비 흐름을 바꾸고, 상업 생태계를 재편하는 핵심 요인이다. 앞으로 상권의 경쟁력은 입지나 유동 인구만으로 판단하기 어려워질 것이다. 얼마나 쾌적한 소비 환경을 제공하는지, 기후 스트레스로부터 얼마나 자유로운지가 핵심 경쟁력이 된다.

도시 상권은 이미 경쟁이 치열한 레드오션이다. 여기에 기후위기까지 겹치면서 상권 양극화는 더 심화할 것으로 보인다. 지하상가와 복합몰로 사람이 몰린다는 것은 그만큼 거리 상가나 재래시장의 발길이 줄어든다는 뜻이다. 기후재난이 일상이 된 지금, 도시의 상업 지형은 이처럼 다시 그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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