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만창
중국만창

현종과 양귀비의 비극적 사랑을 그린 시 ‘장한몽’(長恨歌)으로 잘 알려진 당(唐) 나라 시인 백거이(白居易,772~846)는 문인 원진(元稹, 779~831)보다 일곱살 위였는데도 친구였다. 백거이와 원진은 이부(吏部) 시험에 함께 합격한 동기이기도 했다. 중국 문학사에선 통속적이면서도 쉬운 말로 작품을 만든 신악부운동(新樂府運動)을 펼친 이들 두 사람을 ‘원·백’(元·白)이라고 불렀으며, 이들의 시를 ‘원화체’(元和體) 또는 ‘장경체’(長慶體)라고 했다.

‘입추일에 곡강에서 원진을 그리워하며’(立秋日曲江憶元九·입추일곡강억원구)는 백거이가 입추를 맞아 원진을 그리워하며 지은 시다.

下馬柳陰下 (하마류음하·버드나무 그늘 아래 말에서 내려)

獨上堤上行 (독상제상행·홀로 방죽 위에 올라 걷네)

故人千萬里 (고인천만리·옛 친구는 천만리 먼 곳에 있고)

新蟬三兩聲 (신선삼량성·갓 나온 매미는 두세 번 울음 운다)

城中曲江水 (성중곡강수·장안성 안엔 곡강이 흐르고)

江上江陵城 (강상강릉성·장강 가에는 강릉성이라네)

兩地新秋思 (양지신추사·두 곳에서 초가을 상념 속)

應同此日情 (응동차일정·이날의 그리운 마음 다 같으리)

이 시는 백거이가 810년 39세로 장안에서 한림학사로 있을 때 지은 시이다. 곡강(曲江)은 장안성 남동 모퉁이에 있는 연못인 곡강지(曲江池)다. 원구(元九)는 원진(元稹)을 가리킨다. 항렬이 아홉 번째였기 때문에 ‘원구’라고 했다. 이 때 원진은 강릉(江陵)으로 좌천돼 있었다. 멀리 지방에 가 있는 원진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절절하다.

원진은 백거이와 신악부(新樂府) 운동을 같이 벌였다. 원진이 지방으로 좌천된 건 고위 관리의 비리를 상소했기 때문이다. 백거이는 ‘藍橋驛見元九詩’(남교역견원구시), ‘舟中讀元九詩’(주중독원구시) 등 원진을 그리워하는 시를 적지 않게 남겼다.

두 사람은 또 서간을 통해 우정을 이어갔다. 원진은 백거이 또한 귀양을 떠났다는 말을 듣고 붓을 들어 백거이에게 보내는 서찰을 썼고 그 속에 ‘문낙천수강주사마’(聞樂天授江州司馬)라는 시 한 편을 동봉했다.

殘燈無焰影幢幢 (잔등무염영당당· 곧 꺼질 등불이 흔들거리는데)

此夕聞君謫九江 (차석문군적구강· 오늘 밤 그대의 귀양 소식 들었네)

垂死病中驚坐起 (수사병중경좌기· 곧 죽을 병중에도 일어나 앉아있는데)

暗風吹雨入寒窗 (암풍취우입한창·어둔 밤의 빗소리 쓸쓸한 창으로 들어오네)

백거이는 원진에게 보내는 답장 서찰 속에 “‘곧 죽을 병을 앓고 있는 중’이라는 구절만 보면 내 맘속에 여전히 참을 수 없는 슬픔이 일어난다오”라고 썼다. 서찰을 받은 원진은 백거이가 보낸 편지라는 것을 알고 봉투를 열어보기도 전에 눈물로 앞이 흐려졌다.

백거이는 자(字)가 낙천(樂天), 호는 취음선생(醉吟先生), 향산거사(香山居士)다. 다작(多作) 시인으로 현존하는 문집은 71권, 작품은 총 3800여 수에 달한다. 당대(唐代) 시인 중 가장 많을뿐더러 시의 내용도 다양하다. 젊을 적엔 사회, 정치의 실상을 비판하는 풍유시(諷喩詩)를 많이 지었으나, 강주사마로 좌천되고 나서는 일상의 작은 기쁨을 주제로 한 한적시(閑適詩)를 많이 남겼다.

강주에 있을 때 지은 ‘비파행’(琵琶行)과, 현종(玄宗)과 양귀비의 사랑을 노래한 장시 ‘장한가’(長恨歌)로 이름을 드날렸다. ‘비파행’은 비파 연주를 묘사한 구절이 최고의 절창으로 꼽힌다. 사랑하는 남녀 사이를 뜻하는 ‘연리지’(連理枝)와 ‘비익조’(比翼鳥)라는 표현은 장한가를 통해 유명해졌다.

在天願作比翼鳥 (재천원작비익조·하늘에서 만난다면 비익조가 되기를 원하고)

在地願爲連理枝 (재지원위연리지·땅에서 만난다면 연리지가 되기를 바라네)

비익조(比翼鳥)는 암수컷이 서로 눈 하나, 날개 하나씩만 가지고 있어 둘이 함께 나란히 있어야만 날 수 있다는 상상의 새다. 연리지(連理枝)란 뿌리가 서로 다른 두 그루의 나무가 서로 얽혀 하나의 나무처럼 자라난 것을 말한다.

백거이의 시는 ‘짧은 문장으로 누구든지 쉽게 읽을 수 있는(平易暢達·평이창달) 것을 중시해 사대부계층뿐 아니라 기녀, 목동 같은 신분이 낮은 사람들까지 애창했다.

정치적 혼란에 염증을 느낀 백거이는 말년에 낙양시 남쪽 용문 석굴 맞은 편의 향산사를 자주 찾고, 스스로 향산거사라 부르며 지냈다. 노년엔 병으로 고생하다가 일흔 다섯살 나이로 세상을 떠났는데 향산사에서 가까운 용문산에 묻였다. 전국에서 추모객이 몰려 들어 묘소 앞 땅이 추모객들의 눈물로 젖었다는 애기가 전해진다.

원진은 자가 미지(微之)로, 하남성 낙양시 사람이다. 전쟁으로 고통 받은 농가의 슬픔을 그린 ‘전가사’(田家詞) 등 ‘신제악부’(新題樂府) 12수를 지었는데 3수인 ‘견비회’(遣悲懷·슬픈 마음 쏟으며)가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된다. 먼저 세상을 뜬 아내를 그리워하는 내용이다.

하지만 원진은 한때 여류 시인 설도(薛濤)와 연인 관계이기도 했다. 요석(樂石) 김성태가 작곡한 우리 가곡 동심초(同心草)’의 노랫말은 설도의 시에서 비롯됐다. 김소월의 스승인 안서(岸署) 김억(金億)이 설도의 시 ‘춘망사’(春望詞) 4수(四首) 중 세 번째를 번안한 것이다.

꽃 잎은 하염없이 바람에 지고

만날 날은 아득타 기약이 없네

무어라 맘과 맘은 맺지 못하고

한갖되이 풀잎만 맺으려는고

한갖되이 풀잎만 맺으려는고

가곡 동심초의 1절 노랫말이다.

춘망사 3수는 다음과 같다.

風花日將老(풍화일장로)

佳期猶渺渺(가기유묘묘)

不結同心人(불결동심인)

空結同心草(공결동심초)

원진은 그러나 후에 환관 세력과 결탁해 정치적 출세를 누려 인생에 오점을 남기기도 했다.

강현철 논설실장(hckang@d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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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현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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