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창걸 고려아연 명예회장 빈소.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20호실)에 마련됐다. 고려아연 제공.
최창걸 고려아연 명예회장 빈소.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20호실)에 마련됐다. 고려아연 제공.

고려아연을 세계 1위 비철금속 제련기업으로 키워낸 ‘비철금속 업계 거목’ 최창걸 명예회장이 지난 6일 숙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84세. 1978년 아연 제련공장을 준공하면서 본격적으로 아연 산업에 뛰어들어 반세기도 안 돼 한국의 제련산업을 세계 최고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등 한국 현대사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1941년생인 최 명예회장은 황해도 봉산에서 태어나 경기고와 서울대 경제학과를 거쳐 미국 콜롬비아대학교에서 MBA를 취득한 후 3년간 직장생활을 한 뒤 한국으로 돌아와 1974년 고려아연의 창립부터 회사와 함께 했다. 처음에는 ‘영풍광업’에서 재무·회계 업무를 도맡았으나, 회사는 아연을 국산화 하자는 기치 아래 1978년 온산제련소를 준공에 돌입했다.

그는 국내에선 국민투자기금과 산업은행 등으로부터 돈을 끌어왔고, 부족한 돈을 빌리기 위해 국제금융공사(IFC)를 설득해 자금을 확보하며 고려아연의 시작에 크게 기여했다. 당시 IFC는 사업자금으로 7000만달러가 필요할 것이라고 했지만, 5000만달러에 공사를 끝낼 수 있다고 설득한 일화는 유명하다. 그는 부족한 자금으로 공장 건설이 난관에 부딪치자 건설을 통째로 맡기는 ‘턴키’방식이 아닌 직접 수십 개의 단종면허 토목공사업체와 건건이 계약해가며 구매에서 건설까지 직접하는 방식으로 돌파해 나가며 비용을 절감했다. 결국 4500만달러로 공사를 끝마치며 500만불이 남았고, 공장 건설 노하우·기술까지 한꺼번에 습득할 수 있었다. 회사는 1982년 기술연구소를 설립하고, 1987년에는 아연괴 연산 17만톤 규모 체제를 구축하는 등 양적으로 성장을 거듭했다.

회사의 성공은 한국의 산업화 성공과도 매우 밀접한 연관이 있다. 회사가 창립하기 1년 전인 1973년 발표된 ‘중화학공업 육성계획’과 시기가 맞물린다. 아연은 철에 도금을 하면 철 대신 부식되면서 철의 내구성을 높여주는 금속으로, 국가 주도로 철강산업이 성장하며 아연의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던 시기였다. 처음에는 아연을 수입에 의존해야 했고, 철강의 품질과도 직결되는 문제여서 한국에게는 반드시 필요한 금속이었다. 회사는 일본, 벨기에 등에서 제련기술을 적극적으로 도입해 1978년 국내 최초로 아연 생산에 성공했다. 그럼에도 시운전 및 정상화하는데에만 2년의 시간이 걸렸다. 회사는 이후에도 제련기술 연구를 지속, 헤마타이트 공법 등 고도화된 제련법의 상용화에 성공하며 생산량을 늘려나갔다. 지금도 아연은 알루미늄, 구리와 함께 산업에서 가장 중요한 금속 중 하나로 꼽힌다.

1987년에는 코리아니켈을 설립하는 등 여러 비철금속을 다루는 회사로 확장해 나갔다. 지금은 아연 외에도 연, 구리, 금, 은은 금속은 물론, 반도체와 디스플레이에 쓰이는 인듐, 의약품과 특수화학분야에 널리 쓰이는 비스무트, 방염제·합금 소재·스텔스 도료·에너지 저장장치, 첨단 전자 부품 등에 쓰이는 안티모니 등 각종 희소금속까지 제련해 수출까지 하고 있다.

이처럼 최 명예회장이 회사와 함께하는 동안 자원빈국이자 아연 제련업 불모지였던 한국은 30년 만에 10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전 세계 제련소들을 제치고 세계 최고의 종합비철금속 기업을 지닌 나라가 됐다. 회사는 전 세계 제련소를 대표해 세계 최대 광산업체와 벤치마크 제련수수료(TC)를 협상하는 기업이 됐다. 1992년 3월 회장 자리에 오른 최 명예회장은 ‘원칙에 어긋나는 것은 하지 말고 기본에 충실하자’라는 구호 아래 고려아연의 성공을 위해 매진했고, 2002년 이후 명예회장으로 한발 물러난 뒤에도 지속적으로 회사의 기술과 경영에 도움을 줬다.

최 명예회장은 아버지인 최기호 선대회장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최 선대회장은 최 명예회장에게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부잣집 아들들이 재산을 다 잃은 이야기를 전해주면서 “아무리 돈이 많아도 재산을 잃으면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다. 손에 쥔 재산은 언제든 잃을 수 있지만 머리에 든 재산은 절대 잃지 않는다”고 가르쳤다. 그는 선대의 가르침을 회사에 적용했다. 그는 “나는 혁신이나 개혁은 좋아하지 않는다. 그것은 이미 늦은 것”이라며 “매일매일 조금씩 발전해 나가면 한꺼번에 큰일을 해야 할 필요가 없다. 개혁보다는 변화가 중요하다”는 말을 남겼다.

최 명예회장의 장례는 7일부터 4일간 회사장으로 진행된다. 이제중 고려아연 부회장이 장례위원장을 맡았고, 빈소는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20호실)에 마련됐다. 영결식은 10일 오전 8시에 열린다.

최창걸 고려아연 명예회장이 지난 6일 숙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84세. 고려아연 제공.
최창걸 고려아연 명예회장이 지난 6일 숙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84세. 고려아연 제공.
임재섭 기자(yjs@d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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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재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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