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화균 편집국장

“한국인이라는 게 행운이죠.”

최근 해외 여행을 다녀온 지인들로부터 자주 듣는 얘기다.

일단 ‘여권 파워’를 그 근거로 든다. 한국 여권으로 192개국을 무비자로 드나들 수 있다. 일본과 함께 공동 2위다. 미국에서 한국인 직원 강제구금 사태가 발생했지만, 많은 나라에서 여전히 비자 없이 국경을 넘나들 수 있는 마패다.

여권파워는 여행 편의성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국제 사회가 한국을 얼마나 신뢰하고 있는지, 외교 관계가 얼마나 원활한지를 보여주는 척도이다. 우리 여권이 높은 순위를 유지한다는 것은 한국 이라는 국가 자체가 세계적으로 안정성과 신뢰를 확보하고 있다는 뜻이다.

‘K-컬처’도 단골 메뉴다. K-팝은 전 세계 어느 곳을 가더라도 만국 공통어다. 영화의 도시 프랑스 칸에서도 한국 영화 오징어게임이 통한다. 지난해 10월에는 한강이라는 노벨 문학상 수상자도 배출했다. 괜히 알은 채하는 외국인에 그냥 어깨에 힘이 들어간다고 한다.

기업의 힘도 자랑거리다. 삼성전자, 현대자동차, LG전자는 외국서도 부러워하는 ‘메이드인 코리아’의 대표 브랜드다.(필자는 20년 전 영국에 1년간 머문 적이 있다. 당시 영국의 인기 방송 프로그램에서 한국산 냉장고를 해머로 부수며, 한국 자동차는 이런 허접한 것으로 만든다고 폄훼하는 장면을 보고 몹시 화가 난 적이 있다.)

경제와 외교, 문화의 힘은 글로벌 무대에서 상호 작용을 한다. 날줄과 씨줄이 잘 엮이면 엄청난 상승작용을 한다. 그 효과는 거론하지 않아도 숫자로 입증됐다.

혹자는 그래서 한국이 단군 이래 최대 강성기를 누리고 있다고 평한다. 지금이 가장 아름답고 찬란한 시절, 즉 화양연화(花樣年華)라는 것이다. ‘국뽕주의자’들의 맹목적 찬양만은 아니다.

이런 한국이 쇠락과 흥성 사이의 갈림길에 서있다. 현실과 전망 모두 긍정적이지 않다. 어느 한곳도 녹록지 않다.

경제성장률을 놓고는 ‘0%대 늪’ 경고음이 계속 울린다. 잠재성장률 2%도 이제는 꿈의 숫자다.

당장 올해 1인당 국민소득에서 경쟁국인 대만에 추월당할 처지다. 국민소득 4만달러 시대도 대만은 내년, 한국은 2년 뒤에나 가능할 것이라고 한다. 그것도 한국의 경제 체질을 갈아 엎는 구조개혁이 성공해야 하는 전제조건이 있다.

미래의 돈을 끌어다 급한 불 끄기를 하다보니 국가 재정은 갈수록 고갈되고 있다. ‘노후 방파제’인 국민연금도 고갈 경고음이 울린 지 오래다. 그런데도 계속 돈을 풀겠다고 한다. 미래 세대를 향해 부채 청구서가 연일 발송되고 있다.

결혼과 출산은 사치다. 10년 이상을 한푼도 쓰지 않고 꼬박 모아야 하는 서울 아파트 한 채를 겨우 장만할 수 있다. 기득권이라는 꿀통에서 꿀을 빨고 있는 기성세대의 탐욕이 미래세대의 앞길을 가로막고 있다.

경제 성장의 엔진인 기업도 동력도 잃고 있다. 앞으로는 기업 경쟁력 강화를 외치면서도 뒤로는 기업 옥죄기에 혈안이다. 기업 지원보다는 규제강화가, 투자보다는 당장의 ‘과실 나눠먹기’가 더 큰 압박으로 다가온다. 새로운 성장을 위한 만능키로 내세우는 ‘인공지능(AI) 3대 강국’도 아직은 공허한 구호다. 당장 대수술을 하지 않으면 생식능력은 커녕, 사망선고를 받을 수 있는 중증 상태다. 사면초가다.

정치는 기대난망이다. 대화와 타협마져 내팽겨쳤다. 집권 여당은 내편 챙기기에, 제1 야당은 아스팔트 투쟁에 올인하고 있다. 국가전산망이 먹통이된 상황에서도 ‘네탓공방’만 하고 있다. ‘그래도’, ‘그나마’라는 ‘차선의 평가’를 받았던 대통령의 리더십도 살짝 흔들리는 모습이다. ‘실망 매물’이 출회하고 있다.

그러다보니 코리아 엑소더스가 이어진다. 이재명 정부들어 지난 26일까지 한국 증시에서 이탈한 투자금만 18조원을 넘는다. 주가는 선행 지표다. 그나마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3500억달러 선불’이라는 강펀치에 당장 내일 증시가 두려운 상황이다. 1400원을 넘어선 원·달러 환율도 계속 요동치고 있다.

전설의 투자자 워런 버핏은 자신을 행운아라고 했다. 그는 “노력만으로는 불가능했다. 미국인으로 태어나는 행운을 누렸기에 부와 성공을 이룰 수 있었다”고 했다. 토양, 즉 투자 환경의 중요성을 강조한 말이다. 버핏이 전쟁 구렁텅이 속에서 태어났다면, 오마하의 현인은 없었을 것이다.

필자는 20대 직장인 아들이 있다. 아직은 아들이 한국인으로 태어난 것이 분명 행운이라고 믿는다. 여전히 꿈과 희망을 키울 수 있는 토양은 남아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하지만 얼마나 더 이런 생각을 이어갈 수 있을까. 두렵다.

김화균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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