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현철 논설실장
‘비틀거리는 헥사곤’(육각형·L‘Hexagone). 최근 프랑스의 모습이다. 헥사곤은 영토 모양이 육각형과 닮았다는데서 유래한 프랑스의 별명이다. 다혈질적인 국민성 등의 영향으로 유독 시민혁명이 잦았던 프랑스가 다시 혼돈에 휩싸였다.
이번 혼돈의 원인은 경제가 촉발했다. 국가채무가 누적돼 손쓸 수 없을 지경에 이르자 총리가 허리띠를 졸라매는 내용을 담은 내년도 예산안을 추진했는데 이게 야당과 국민들의 반발로 무산되며 결국 내각이 총사퇴하고 국가신용등급도 떨어진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과도한 국가채무는 필연적으로 국가 위기를 야기하게 된다는 평범한 진리를 다시 한번 일깨우는 사례로, 나랏빚이 급속도로 증가 추세인 한국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국제 신용평가사 피치는 지난 12일(현지시간) 프랑스의 국가신용등급을 ‘AA-’에서 ‘A+’로 한 단계 하향 조정했다. 향후 등급 전망은 ‘안정적’으로 평가했다. 피치는 보고서에서 등급 조정에 대해 “정부가 신임 투표에서 패배한 것은 국내 정치의 분열과 양극화가 심화했다는 방증”이라며 “이러한 불안정성은 상당한 재정 건전성을 달성하는 정치 시스템의 역량을 약화한다”고 설명했다.
피치의 이번 결정은 프랑스 전역에서 정부의 긴축 정책에 항의하는 ‘국가 마비’ 시위가 벌어지는 가운데 나왔다. 프랑수아 바이루 전 총리가 지난 7월 공휴일을 축소하는 한편으로 사회복지 등 공공지출 감축, 고소득자 증세를 통해 2026년 국내총생산(GDP) 대비 재정적자 비율을 4.6%로 낮추고, 중기적으로 2029년엔 유럽연합(EU)의 재정준칙 수준인 3% 이하로 회귀하겠다는 내용을 담은 예산안을 발표한 게 시위를 촉발시켰다.
프랑스의 재정적자는 지난해 기준 GDP의 5.8%로, 유로존 평균(약 3.1%)을 크게 웃돌았다. 국가부채는 GDP의 113%를 넘어 유로존에서 그리스, 이탈리아에 이어 세 번째로 높다. 피치는 “향후 몇 년간 국가부채 안정화를 위한 명확한 시야가 없는 상태”라며 “국가부채가 2024년 GDP의 113.2%에서 2027년에는 121%로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고 전망했다.
시민들은 소셜미디어(SNS)를 통해 ‘9월 10일 국가를 마비시키자’는 캠페인을 벌였다. 결국 지난 8일 하원으로부터 불신임받아 바이루 정부는 해산했으며, 총리 후임으로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이 측근인 세바스티앵 르코르뉘 국방부 장관을 임명하자 분노한 시민들은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마크롱 2기 행정부가 2년이 채 되지 않아 총리를 4번이나 교체할 정도로 긴축 정책을 둘러싸고 정국 혼란이 이어지면서 재정 건전성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다. 국가신용등급이 하락하면 글로벌 금융시장에서 차입 비용이 상승해 재정 악화 심화로 이어지는 악순환에 빠질 수 있다.
로이터 통신은 이번 등급 강등이 내년도 긴축 예산안을 마련하느라 고군분투하는 르코르뉘 총리에 압박을 가할 것이라고 분석했다. 프랑스 국채 10년물과 이탈리아 국채의 10년물 금리는 거의 비슷한 수준이 됐다. 프랑스 국채에 대한 신뢰도가 이탈리아 수준으로 후퇴한 것이다.
피치의 신용등급 강등에 프랑스 정치권에선 ‘네 탓 공방’이 재현됐다. 긴축 재정을 추진하다 사실상 쫓겨난 바이루 전 총리는 엑스(X·옛 트위터)에 “‘엘리트’들이 진실을 거부하도록 이끄는 나라는 그 대가를 치를 수밖에 없다”고 비판했다.사임한 브뤼노 르타이오 내무장관도 같은 채널에 “신용등급 하락은 혼란 조장 세력들이 초래한 만성적 불안정뿐 아니라 수십년간 지속된 재정 방만과 사회주의 국가식 정책 방황에 대한 응징”이라며 “오늘 우리가 취하지 않는 모든 조치는 내일 더 큰 고통으로 돌아올 것”이라고 우려했다.
반면 바이루 정부 몰아내기에 앞장섰던 극좌 성향 ‘굴복하지않는프랑스’(LFI)의 에리크 코크렐 의원은 “이번 평가의 책임은 자신의 정치적 의제를 위해 공공 재정 상태를 과장한 이들에게 있다”며 “프랑스 부채는 여전히 안전하고 선호되는 자산”이라고 강조했다고 일간 르몽드는 전했다.
LFI는 성명에서 “새 정부 역시 시장 의존적 긴축 정책을 택한다면 스스로 예고한 재앙을 맞을 것이며 국가를 경제·사회·생태적 위기로 더 깊이 몰아넣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한편 르코르뉘 신임 총리는 13일 전임 정부의 공휴일 폐지안을 철회하겠다고 밝혔다. 르코르뉘 총리는 이날 공개된 프랑스 지역 매체 쉬드우에스트와 인터뷰에서 전임 정부가 제안한 이 안이 내년도 예산안에서 제외될 것이라고 밝혔다. 다만 이 제안을 철회하는 대가로 “다른 재원 확보를 요구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르코르뉘 총리는 정부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기관 통합이나 폐쇄를 포함한 국가 조직 개편에 나설 가능성을 거론했다. 아울러 “대규모 지방 분권화 법안”을 제출하고 이에 대한 논의를 다음 주부터 시작할 계획이라고 덧붙였다. 중복된 업무로 인한 비용 낭비를 막기 위해 의사 결정 체계도 간소화할 것이라고 말했다.
르코르뉘 총리는 또 정부가 모범을 보이기 위해 “일부 전직 정부 구성원에게 여전히 ‘평생’ 부여되는 마지막 특권들을 폐지하겠다”고 밝히면서 “국가 고위직이 노력하지 않으면서 국민에게만 희생을 요구할 수는 없다”고 밝혔다.
강현철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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