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준호 부국장 겸 IT바이오부장
이재명 대통령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지난달 25일(현지시간) 한미 정상회담에서 세계가 가장 주목한 한 마디는 “(트럼프) 대통령님이 피스메이커가 된다면, 저는 페이스메이커가 되겠다”는 이 대통령의 말이었다. 그러나 필자는 남북문제와 북미관계에 대한 이 대통령의 언급이 더 귀에 들어왔다. “제가 직접 관여해 해결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이 문제를 진전시킬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바로 (트럼프) 대통령님뿐”이란 대목이다.
이 말은 단순한 외교적 수사가 아니다. 한국은 나서지도 않고, 패싱당했다고 서운해하지도 않을테니 한반도 문제를 한 번 풀어보라고 트럼프에게 짐을 떠넘긴 것이다.
그간 한국의 입장은 ‘남북 관계는 민족 문제이고 분단된 국가의 두 체제 간 특수 관계이니 주변국이 주도할 생각을 하면 안된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김영삼 대통령은 1994년 미국 빌 클린턴 행정부가 북한 영변 핵시설을 폭격하려고 했을 때 제임스 레이니 주한 미 대사를 불러 “미국이 우리 땅을 빌려서 전쟁을 할 수는 없다. 한국군 60만 중에 절대 한 사람도 동원하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했다고 회고록에서 밝힌 바 있다.
김대중 대통령은 남북 문제와 북미 관계 개선의 주도권을 한국이 완전히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고 클린턴 대통령을 설득했다. 그 결과 1998년 6월 9일 클린턴 대통령은 워싱턴D.C의 백악관에서 김 대통령에게 이렇게 말했다. “김 대통령이 운전대를 잡고, 나는 조수석으로 옮겨 보조적 역할을 하겠습니다. 김 대통령이 이제 한반도 문제를 주도해 주기 바랍니다.”
동북아 균형자론을 주장한 노무현 대통령의 경우는 더 말할 것도 없다. 한국이 한반도 주변 4강 사이에서 중재자 역할을 해야한다고 생각했다.
박근혜 대통령은 ‘굳건한 한미공조’를 금과옥조로 여겼지만 한반도 문제는 ‘한국이 주인’이라는 인식을 바탕으로 해결해야 한다고 봤다. 느닷없는 “통일은 대박” 발언은 다소 허망했지만 한국이 한반도 정세 변화를 이끌겠다는 뜻만은 분명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북미관계가 먼저 좋아져야 남북관계 개선이 따라온다고 본 최초의 대통령이었다. 그러나 중재자 역할에 너무 집중한 나머지 성과를 내지 못했다.
이번 한미 정상회담에서 이 대통령의 남북·북미 관계 해결 구상은 과거 대통령들과는 결이 틀리다는 것이 확인됐다. 미국이 주도하고 한국은 돕겠다는 것인데, 이는 현재 국제정세를 감안할 때 매우 적절한 방안이라 생각된다.
우선 북한은 이미 과거의 북한이 아니다. 50기 이상의 핵무기와 장거리 핵운반능력을 보유했고 어떤 조건을 제시해도 핵을 내놓지 않을 것임을 이젠 전세계가 알고 있다. 북한은 한때 중국과 러시아의 골칫거리였다. 그러나 최근 수년 사이 미국과 중러의 신냉전 체제가 굳어지면서 몸값이 달라졌다. 그동안은 중국에 모든 것을 의존했지만 최근 우크라이나전쟁에 전투병을 파병하면서 러시아의 도움도 받고 있다.
북한은 이미 2023년부터 ‘2국가론’을 주장하고 있다. 북한은 70여 년 동안 주장한 통일 노선을 모두 철폐했다. 지난달엔 김여정 북한 노동당 부부장이 “한국은 외교 상대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이 남북관계와 북미관계 개선을 위해 나선다고 해도 얻을 게 없다. 더구나 트럼프는 다자주의를 극도로 싫어하고 양자 담판만이 외교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한국이 나설 틈이 없다.
9월 3일 김정은은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함께 톈안먼 망루에 선다. 서방세계는 이것이 미국과 북중러의 신냉전 구도를 확정짓는 장면이 될 거라고 본다. 이날 이후 한국은 아무리 균형을 잡으려고 해도 이 신냉전에 끌려들어갈 수밖에 없다. 미국의 편에 선 이상 북중러의 정치·경제적 압박을 견뎌내야 한다.
이런 상황을 벗어날 수 있는 길이 있다. 바로 미국이 북한과 대화하고 수교까지 이르도록 뒤에서 조용히 돕는 일이다. 북미가 친구가 된다면 한국은 고래등 사이에 낀 신냉전 구도에서 조금이라도 움직일 공간을 확보할 수 있다. 이 대통령이, 세계가 주목한 그 말처럼 진짜로 한반도 평화의 페이스메이커가 되길 기대한다.
부국장 겸 IT바이오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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